[야설 게시판] 나의 터프한 아내(The valley) - 상편 - 딸타임

나의 터프한 아내(The valley) - 상편

1. prologue





“세게좀 밟아봐!!”

-야 밟는다고 그게 나가니? 이렇게 꽉 막혔는데?

“아씨 그럼 뭐라도 해봐!!”

-후우 말을 말자 마.



막힐대로 막혀있는 고속도로에 갖힌채로, 나와 와이프는 벌써 몇분째 그렇게 옥신각신 다투고 있었다. 휴가 시즌이라는건 차치하고서라도 이렇게까지 막힐줄 알았다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게 나을 뻔했다. 자동차 옆자리에 앉아 연신 씩씩대는 와이프가 한사코 대중교통은 안된다고 버티고 버틴탓에 60개월 할부로 사버린 소형차에 갇혀서는 꼼짝없이 앉아있는 꼴이라니. 그저 한심할 따름이다.



“짜증나, 그러니까 차 좀 좋은거 사자구 했잖아.”

-야 이게 차 탓이냐?

“왜 아니야? 그럼, 오빠탓인가보네.”

-후우, 말을 말자 마.



불난곳에 부채질 하는것도 아니고, 옆에 앉아있는 아내가 연신 짜증섞인 불만을 쏟아내는 탓에 내 쪽에서도 좋은말이 쏟아질리 만무했다. 괜히 더 말을 엮었다가는 언성만 높아질것 같아 나는 창문쪽에 팔을 괴고선 차창 밖을 응시했다.



한심하다.

2천만원도 하지 않는 차한대 사는데도 잔득 겁을 주워먹고선, 60개월 할부로 구입하는게 고작 내 인생이다. 서른을 넘어 서른 중반을 향해 가는 나이, 전직원 규모가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중소기업’에서 미래도 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것. 그것 또한 내 인생이다. 그럼에도 어떻게 결혼은 해서 마누라랑 살고 있다니, 아이러니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짧게 한숨을 내쉰뒤 나는 슬쩍 보조석에 앉아있는 은혜의 눈치를 살폈다. 토라졌는지, 와이프도 고개를 창가쪽으로 하고선 가슴에 팔짱을 낀 채 앉아있었다. 덕분에 풍만한 가슴이 양팔에 눌려 보기좋은 볼륨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킨뒤 갸름한 아내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결혼 3년차 주부치곤 여전히 봐줄만한 얼굴이다.

캠퍼스 커플이었던 아내와 나는 3년전에 결혼했다. 인문학부 건물에서 친구들과 함께 나오던 은혜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는 거머리처럼 물고 늘어졌던 것도 나였고, 울고불고 사정사정하면서 결혼해달라고 매달렸던 것도 ‘꼴사납지만’ 내 쪽이었다. 하아. 후회한들 무엇하겠냐만은 짧다면 짧은 인생을 돌아보건데, 내가 결정했던 적지않은 일들중에 가장 ‘하지 말았어야 할 두 가지’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저 상기의 두 가지를 꼽을 작정이다. 철모르는 친구놈들에게 우리 부부 얘기를 들려주면, 열에 아홉은 ‘두 살터울에 예쁜 와이프를 얻은 놈이 배가 불렀다’며 핀잔을 주기 일쑤였지만, 그건 정말 ‘속을 모르는’ 소리다.

결혼하자마자 전업주부를 선언하며 집구석에 눌러앉아 버린건 애교로 봐줄 수 있다 치자. 그렇다고 퇴근후에 밥을 챙겨주는 것도 아니야, 기껏해야 먹으라고 챙겨주는건 우유에 말아먹는 씨리얼이 다반사였다. 그렇다고 가정살림을 잘하는것도 아니었다. 주말이면 성격탓에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하는것도,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어 찬거리를 정리하는 쪽도, 모두 ‘내쪽’ 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몸매가 망가진다며’ 결혼 3년차에 접어든 주부로써, ‘임신’을 거부하고 있는 그녀의 태도엔 정말 진절머리가 난다. 뭐 그렇다고 섹스를 거부하고 그러는건 아니다.

섹스라고 해봐야 침대위에 개구리처럼 가랑이를 벌리고 누워선 팔베게를 하고 있는 은혜위에 누워, 나혼자 바삐 왔다갔다를 반복하는게 끝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내가 꾸준하게 몸매관리를 한 덕분인지 섹스에 관해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아... 나만 그런거야?.... 나만 그렇게 느끼는거야?..



답답해서 어떻게 사냐고 묻는다면, ‘원체 생겨먹은 성격이 소심한지라 그냥 그러려니 하며 삽니다’ 라고 말해주고 싶다. 측근이라 불리우는 자들이 가끔, 결혼하고 3년동안 변변한 부부싸움이래야 한적이 없는 우리 부부를 부러워하며 소위 ‘금슬 좋은 부부’나 ‘잉꼬부부’라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나불거릴때면, 난 그저 속으로 ’내가 병신이라 그래‘ 를 외치곤 했던게 다반사다. 그래 내가 ’병신‘이라 참는다. 후우.



그래도 연애기간부터 결혼을 통틀어 와이프에 대해 안좋은 기억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눈꼬리가 올라간 ‘도도한 미인형’의 얼굴을 한 와이프 덕분에 좋았던 기억도 많다. 솔직히 ‘섹스’에선 뭐 말할것도 없겠고, 아 그래! 한가지 확실한건 내가 은혜에게 있어 육체적으론 ‘첫번째’ 남자였다. 남자들은 알겠지만, 이건 쥐뿔도 없는 나의 입장에선 과히 자랑할만한 일이다. -물론 현실에서 자랑한답시고 떠벌리면 그렇게 ‘병신’이 되는 거다- 왜 그런거 있지 않나? 정말 헉소리 나게 이쁜 미인들보다, 그보단 덜하지만 준수하게 생긴 여자들한테 더 많은 남자들이 대쉬를 하거나 하는것. 은혜가 그런 케이스였다. 그러니까 ‘하도 이뻐서’ 남자들이 대쉬하지 못하는.... 아 팔불출 같다. 연애시절 들은 바로는 놀랍게도 초중고에서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고백을 했던 남자가 기껏해야 2명밖에 없었단다. 그마저도 시덥지않게 굴어버린 탓에, 거두절미하고 거절해 버렸다고 했다. 잔득 들떠서는 ‘그럼 용기를 내서 고백을 한 나의 남자다움에 반한거야?’ 라며 싱글벙글대며 물었던 나에게 ‘아니, 그건 아니구, 그냥 오빠가 존나게 귀찮게 해서.’ 라는 대답을 오른손 중지를 펴보이며 고이 돌려준 은혜를 떠올리자니, 다시금 부화가 치어 오른다. 나쁜 계집애.



어찌되었든 그래도 모처럼만의 여행이다. 가구를 생산해 납품하는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 대리를 맡고 있는 나로썬, 강원도 어디쯤으로 떠난다는 워크숍 날짜에 ‘난 안되겠소!! 난 내 휴가 찾아 가겠소!!!’를 외치며 작정하고 이번 휴가를 계획한 참이다. 어차피 회사에선 나를두고 투명인간 취급하며, 소위 ‘왕따’ 취급하는데, 한번 개긴다고 해서 회사생활이 악화되거나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사실 조금 걱정은 돼. 갈데가 없거든. 회사를 때려치면 나를 받아줄 곳이 없네, 그게 함정이야.



충동적으로 아내에게 충청도 온양에 가자고 선포아닌 선포를 했던게 이번년도 1월의 언젠가였다. 일이 이렇게 될줄 알았으면 좀더 심사숙고 하는건데. 이제와서 대머리 김부장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한켠이 서늘해진다. 지금은 내 옆에서 잔득 성을 내고 있지만, 불과 서너시간전만해도 연신 방긋거렸던 은혜였다. 미운정이라도 들어버린 걸까, 그래도 모처럼 나를 보고 웃어주는 와이프의 미소가 어찌나 반갑던지. 그 생각에 은혜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띄워 올린다. 그래 난 아직 내 아내를 사랑해. 진정.



“아썅! 뭐해~~~ 앞차 출발하잖아. 빨리 밟으라고!! 하여튼 굼뗘가지고..”



취소.











2. 온양에 도착하다.



아 어깨가 뻐근해 온다. 분명 서울에서 출발할 때에는 시계바늘이 숫자 9를 가리키고 있었건만 달리고 달려 온양 어디쯤에 차를 세우니 벌써 어둑어둑 밤이 잦아들은 시각이다. 보조석 차문을 열며 ‘피곤하다’를 외치며 기지개를 펴는 아내를 바라보며, ‘니가 한게 뭐가 있는데 기집애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절대 맞을까봐 두려워서 그런건 아니다.



아 미쳐 말을 못했는데, 연애하고 얼마가지 않아 알게된건, 아내의 전공이 인문학계열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학부는 ‘체육학부’ 였다. 그녀를 처음봤던 인물학부 건물과 전혀 연관성이 없는 그녀의 전공에 놀랬던건 둘째치고, 일단 외관상 가녀린 이미지 그 자체인 은혜와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그녀의 전공에 흠씬 놀랬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뭐 반신반의 하며 실실쪼개던 나에게, 고이 주먹을 들어 ‘퍽’소리가 나게끔 내 등을 후려쳐 주시니 믿을 수 밖에 없었던 기억이 있다. 아 비참하구나.



“짐부터 풀고 빨리 스파에 가자 우리.”

-알았다고 쫌!



그러니까 이 여자는 항상 이런식이다. 짐 한두개 정도는 나눠 들 만한데, 지 몸만 쏘옥하고 빠져 나와서는 앞장서서 펜션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꼴이라니. 뭐 어쩌겠나. 그저 나는 양손에 짐을 든 채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을 뿐이다.



“하아!! 하아!! 하아!”



앞서 걷던 아내가 펜션의 방문을 열어 젖히자, 나는 방안에 쿵소리를 내며 손에 들린 짐들을 바닥에 내팽겨 치며 침대위에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흡사 거친 섹스후에 -내 입장에선 아내와의 관계는 항상 거친 섹스의 연속이었다.- 토해내던 그것과 별반 다를게 없는 쉼호흡을 연신 공기중에 격하게 뿜어댔다.



“하여튼, 하여튼, 약해 빠져가지고. 운동좀 해라 인간아!”



그럼 넌 닥치고 빨래 좀 해라. 아니면 밥이라도.

한참을 침대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다가 발밑에서 분주하게 옷을 갈아입는 아내 때문에 천천히 침대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느샌가 수영복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은 아내가 방구석쪽에 자리한 전신거울에 서서 연신 자신의 몸매를 확인한다.



‘꿀꺽’



미우나 고우나 내 와이프가 예쁘긴 예쁘다. 풀어헤친 긴 생머리에 고무밴드를 가져다가 분주하게 움직이니, 아내의 갸느다란 턱선이 고이 보여질만큼 머리카락이 보기좋게 묶여진다. 자신의 뜻대로 아이를 가지지 않은 탓에, 군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잘록한 허리라인과, 바로 그저께 밤에도 연신 주물러댔던 풍만한 엉덩이 라인 -하하하하하- 과, 곧게 뻗어있는 두 다리의 각선미는 단연 최고다. 최고. 서른을 조금 남긴 나이에 이정도의 몸매와 피부를 유지하고 있는 와이프가 이제야 대단하게 느껴졌다.



“빨리 옷갈아 입어. 많이 늦어서 스파에서 얼마 있지도 못하겠네.”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과 한 개 -에이 인심쓴다. 타조알!! 만한!!!- 크기만한 매끈한 젖가슴이 미세하게 출렁거린다. 그걸 게슴츠레 쳐다보자니, 아랫도리가 서서히 반응해 버리고 말았다.



“저기... 은혜야 우리 ...”

-아씨.. 짜증나 변태새끼. 빨리 옷갈아입고 나와.



말을 걸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은혜가, 불룩하게 부풀어있는 나의 바지앞섶을 한번 찡그리며 바라보더니, 육두문자를 내던지며 신경질적으로 방밖으로 나가 버렸다. 더러운 기집애. 지아비를 이런식으로 섬겨서는 안돼.





옷을 갈아입고 부랴부랴 서둘러 아내의 뒤를 따라, 스파 안으로 들어갔다. 꽤나 늦은 시간임에도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피니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때를 지어 스파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내 경제적 처지가 처지인지라, 프리미엄 글자가 붙어있는 ‘가족 온천’ 패키지 프로그램은 언감생심 꿈도 못꾼 탓에, 당장 오늘은 이렇게 은혜와 스파에서 보내고 내일은 남탕 여탕 따로따로 온천에 들어갈 계획을 세웠다. 힐끔힐끔 사람들 눈치를 살피자니, 와이프가 아랑곳하지 않고 터벅터벅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나도 그제서야 헛기침을 한번 하고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이씨.. 솔직히 조금 신경 쓰이는데..’



투피스 비키니 차림으로, 허리춤에 반투명한 레이스 천조각을 걸친채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내를 따라 걷자니, 늑대같은 남자들의 시선이 아내의 몸에 하나둘 달라붙는게 느껴졌다. 갓난 아들의 손을 붙잡은채 눈을 힐긋힐긋 돌리는 아저씨부터, 성장의 심볼이 얼굴가득 자리잡은 중학생 정도의 아이까지. 너나 할것없이 시선이 아내의 몸에 꽂혔다. 불쾌하긴 했지만 어쩐지 말못할 승리감에 도취되어서는 아내를 따라걷던 발걸음 속도를 한층 높였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 아내의 몸 어딘가에 시선을 꽂아넣고 있던 내 나이또래의 사내와 엉겁결에 눈을 마주치고 말았는데, 조금 미묘하면서도 어쩐지 기분나쁜 느낌이 들어 3초정도 눈을 마주치다 이내 황급히 시선을 거두어 버렸다.



“아 좋다.”



얼마간을 걸어 약간의 온기가 뿜어져 나오는 탕 안에 자리를 잡고 아내와 함께 발을 담그자 나도 모르게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 나왔다.



“늙은이 같아.”

-.....



잠시 잊고 있었다. 로맨스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계집애. 눈을 흘겨 아내를 쳐다보자니, 은혜는 이내 귀찮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린다. 그래도 발끝부터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물의 감촉에 몸을 의지하고 있자니 하루간 쌓였던 피로가 금새 풀리는 느낌이 든다.

한동안을 탕의 주변가에 앉아서 아내와 나란히 발을 담그고 있다가, 물기를 머금은채 풍만하게 모여져 있는 아내의 젖가슴을 한번 훔쳐보며 아내의 어깨위로 나의 한손을 스윽하고 얹어봤다.



‘투욱’



손 끝에 아내의 어깨쪽의 살결이 느껴짐과 동시에, 아내의 어깨가 내 손을 ‘격하게‘ 떨쳐내고 만다. 하여튼 로맨스라곤 빈대의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년.



은혜가 먼저 일어나 여기저기를 쏘아다니면, 내가 허겁지겁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는 과정이 한시간남짓 반복됐다. 그리곤 은혜는 기어이 흥미를 잃었는지 허리를 꼿꼿이 세운채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나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밟았다. 뭐 솔직히 나도 이래저래 피곤한게 사실이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얘기하면 당장이라도 방에 돌아가서 와이프의 여기저기를 핥고 만지고 ‘쑤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긴 했다. 나도 남자니까.







“혹시, 조지훈?”



스파입구를 빠져나와 수영복 차림으로 스파에서부터 5분정도 거리에 있는 펜션을 향해 아내와 나란히 걷고 있을 무렵이었다. 내 뒤쪽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내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돌리자니, 아까 나와 눈이 마주쳤던 사내가 멀뚱멀뚱 서 있는게 보였다. 사내는 내 표정을 보더니 이내 얼굴 한가득 미소를 날리며 성큼성큼 아내와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스파에 있을땐 몰랐는데, 보기보다 작고 여리여리한 사내의 체구에 슬쩍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내가 거의 내 눈 앞까지 다가왔을 때 까지도, 좀체 사내가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저 혼자 신나선 연신 큰소리로 떠들어대는 사내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고 서 있노라니, 그제서야 어렴풋하게 이름 두 글자가 머릿속에서 맴돈다.



“아... 벼.. 병길이.. 강병길”

-그래 새끼야!! 나다 임마 큭큭큭



내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거의 반사적으로 사내의 목소리톤이, 방금전에 비해 몇 데시벨 가량 커졌다. 나는 조금 당황해서는 머릿속으로 천천히 강.병.길 이라는 3음절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고1인가 고2때 같은반이었던 녀석이다. 뭐 딱히 친하지도, 그렇다고 친하지 않다고 하기에도 뭣한 딱 그만큼의 관계를 유지했던 녀석인데, 이리도 반가워 하다니. 근 10여년만에 우연히 만나서 그런가 싶은 생각에, 슬쩍 녀석을 바라보니, 녀석이 연신 침을 꼴깍 삼키며 시선을 어딘가에 고정한채 서 있었다. 조심스레 녀석의 시선을 따라가니 아내의 젖가슴이 들어왔다. 그럼 그렇지. 이생키야.



“암튼 반갑다. 그럼 이만..”

-어.. 어? 가.. 간다고? 그.. 그러지 말고 이렇게 만난것도 반가운데, 우리 방에 가서 술이라도 한잔 하자!



자리에 서서 몇분간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이내 그만 헤어질 요량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나와 와이프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던 병길이가 왠일인지 다급히 우리를 잡아챈다. 나야 그렇다치고, 병길의 손이 자신의 팔에 닿자 은혜의 얼굴에 옅은 인상이 드리운다. 아내의 표정이 신경쓰여 애써 병길의 손을 뿌리치자니, 병길이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기어이 자신의 방에 가서 술 한잔만 하자고 조르고 나섰다. 원체 이렇게 막무가내였나 이자식?



“병길씨 무슨일이에요?”



아내와 내 앞에서 애걸복걸하며 사정하고 있는 병길의 등 뒤로, 병길의 이름을 부르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인가? 잘됐다 싶은 생각에 시선을 그쪽으로 꽂아넣으니, 병길과는 대조적으로 다부진 체격의 호리호리한 남자 세명이 우리쪽으로 터벅터벅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얼굴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까지 그 세명의 무리가 다가오자, 그쪽에서도 천천히 이쪽의 상황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는듯 보였다. 아니 조금 더 솔직하게 얘기하면 너 나 할 것없이 그 자식들의 시선이 일방적으로 은혜쪽으로 쏠려 있었다. 스파안에서 느꼈던 불쾌함과는 조금 다른 류의 짜증이 복받쳐서,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아내의 옆에 바짝 기대어 섰다. 그제서야 병길의 무리가 은혜에게서 시선을 거두는듯 보였지만, 유독 헤어왁스로 머리를 바짝 세워 올린 녀석하나만큼은 은혜에게서 시선을 거둘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슨 말이라도 할까 하는 생각에 -물론 그래봐야 입밖으로 내뱉진 못하겠지- 녀석을 노려보다, 병길의 뒤쪽에 서 있던 무리의 남자들이 병길의 설명을 듣고 나서 천천히 자신들의 소개를 하고 나섰다. 김상욱이니 최길수라니,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이름을 묵묵히 들어내며 예의상 얼굴에 옅은 미소를 지어내니, 기어이 기분나쁜 왁스머리가 부드러운 미소를 -솔직히 인정하기 싫지만, 이 자식은 꽤나 미남형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피부도 좋고- 날리며 천천히 자신의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저는 박태준이라고 합니다. 병길씨 고등학교 동창분 되신다구요?”

-아.. 예.

“병길씨가 많이 반가웠나 보네요. 그럼 무례인줄 알지만,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곳에 저희 숙소가 있는데 가서 한잔 하시겠어요?”

-네? 아 그게 저.



내가 왜 이러지? 연신 얼굴 한가득 생글생글 미소를 날리며 나와 아내를 번갈아 바라보던-정확히 얘기하면 은혜를 더 자주 바라보는게 맞다- 박태준이라는 ‘놈’의 말에, 왠일인지 나는 그저 머뭇거리며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협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오히려 은은한 목소리로 ‘청유’에 가까운 부탁을 했을 뿐인데, 나는 옆에 서 있는 은혜의 얼굴을 바라보며 멀뚱멀뚱 서 있을 뿐이었다. 곁눈질로 나를 노려보던 은혜는 마치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슬쩍 돌려버렸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병길일행을 따라 그들이 머물고 있다는 숙소로 아내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3. The Hotel



아내와 내가 머물고 있는 펜션에서 거의 15분쯤 떨어져있는 곳까지 터벅터벅 걸어가자니, 우리 부부와 나란히 서서 걷고 있던 박태준이 연신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냈다. 병길이와는 병길이 아버지와 사업상 잘 아는 사이라는 둥, 김상욱이라는 치는 자기와 대학교 동창이고 다부진 몸매로 말이 없는 최길수라는 사람은 자신의 ‘비서’라는 얘기를 일정한 속도와 톤으로 말했다. 짜증이 나는건, 그의 말에 은혜든 나든 집중해서 들을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이었다. 왜일까? 남자가봐도 혹해보이는 그의 말쑥한 외모 때문일까? 아니면 기껏해야 내 또래밖에 되지 않아 보임에도 개인 ‘비서’까지 둘 정도의 재력 탓일까?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보인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박태준일행이 머물고 있다는 곳까지 따라 걸을 뿐이었다.



‘헉’



박태준을 따라 목적지에 다다르자, 입에서 헉소리가 절로 흘러 나왔다. 아내와 내가 머물고 있는 펜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정말 이런곳이 있었단 말인가? 박태준이 머물고 있다는 곳에 다가가니 딱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외관의 호텔하나가 떡하니 눈에 들어왔다. 박태준의 옆에 서서 뭐가 그리도 좋은지 연신 싱글거리는 병길을 따라 로비로 들어가니, 박태준이 데스크에서 방열쇠를 건내받는게 보였다. 기분탓인지 박태준에게 방열쇠를 건내주는 직원의 태도가 ‘경직’되어 있고 더불어 잔득 긴장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높은 분을 공손히 모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슬쩍 고개를 돌려 아내를 살펴보니, 애써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아내역시 얼굴가득 조금은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제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박태준일행이 머물고 있다는 7층에서 내려 터벅터벅 그들을 따라 걸었다. 복도는 또 왜 그리 긴지 약간의 과장을 보태 1분정도를 걷고 나서야 그들이 머물고 있는 방앞에 겨우 다다를 수 있었다. 박태준이 손에 들린 키홀더를 문에 대고 간단한 조작을 마치자 천천히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내 입에서 새어나오는건.



‘헉...’



마치 거대한 용이라도 본것마냥 동공이 크게 확장되어서는 박태준의 방문너머로 보이는 ‘신세계’를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감탄, 그리고 또 감탄, 마지막으로 또 감탄. 그 이외에는 없어 보였다.



“음.. 어서 들어오세요. 귀한 시간 내주셨는데, 잠깐동안이라도 편히 지내다 가셨으면 하네요”



가진자의 여유일까? 방문앞에 서서 신발을 채 벗지도 못한채 멀뚱멀뚱 서 있는 나를 바라보며 이내 박태준이 방긋웃으며 나를 안내하고 나섰다. 들키지 않을만큼의 나지막한 쉼호흡을 한번 쏟아내곤 은혜와 함께 천천히 박태준의 방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습관처럼 아내의 표정을 살피자니, 은혜역시 얼굴표정이 상기되어 있었다. 조금 기분이 우울해 지길래, 서둘러 신발을 벗고선 박태준 일행이 있는 방안으로 발을 들였다.



건물의 크기도 크기지만 대관절 방에 ‘방’이 몇 개란 말인가. 게다가 슬쩍 곁눈질로 열려져있는 어떤 방을 훔쳐보고선 나는 그저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실내... 온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것 같은 두다리에 애써 힘을 구겨 넣으며 박태준의 호텔방 거실에 멀뚱멀뚱 서 있는데, 병길이 자식의 두 눈이 레이스로 가려진 은혜의 두 엉덩이에 꽂혀 있는게 보여 크게 헛기침을 한번 하니 그제서야 병길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거둔다. 제길, 잠시 정신이 없어서 아내와 내가 수영복 차림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내의 몸을 어떻게든 가려줄 생각으로 천천히 아내에게 다가가니, 어느틈엔가 박태준이 갈색 담요 하나와 하얀색 후드티를 방안에서 꺼내가지고 와서는, 아내에게 건내고 있다.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그런 박태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혜가, 그제서야 자신의 몸을 한번 스윽 바라보다 얼굴을 붉히며 박태준으로부터 천천히 갈색 담요와 후드티를 차례대로 받아든다. 당연히 남편인 내가 해야 할 일을 눈앞에서 보기좋게 박태준에게 뺏긴 나는 아쉬운 마음인지 뭔지 모를 감정과 함께, 자신의 손에 들린 후드티와 갈색담요를 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은혜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셔 봤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병길이 녀석도 입맛을 다시... 음? 하여튼 보면 볼수록 기분이 더러워지는 놈이다.



아내가 어딘가에서 허리춤에 갈색담요를 두르고, 흰색 후드티를 걸치고 나왔을때 거의 동시에, 박태준이 한눈에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양주 여러병을 손에 들고는 커다란 호텔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게 보였다. 이미 속이 꼬일대로 꼬여버린 나는, 박태준의 행동 하나하나에 모든 신경이 곤두서 있던 참이었는데, 마치 상표를 보라는 듯 양주의 브랜드네임이 훤히 보이는쪽을 우리에게 들이밀며 가져오는 그의 태도마저도 나로썬 여간 아니꼬운게 아니었다. 빌어먹을 부르주아. 이코노미컬 카스트로. 하아.



넓지막한 거실에 큰 양주병을 들고 나온 박태준이 거실바닥에 양주를 내려놓고는, 벽에 걸린 컴퍼넌트에 전원을 눌러 무슨 음악인가를 켜자, 박태준과 대학 동기였나 했던 김상욱이 대뜸 ‘아 이거, 스티비 원더 리본 인더 스카이네? 역시 태준인 안목이 있어. 큭. 이거 국내 그룹들도 몇팀이 리메이크도 했었는데 말야.....’ 라며 자신의 ‘지식수준‘을 뽐내기 시작한다. 아주 대단한 음악평론가 나셨다. 표정관리가 되나 안되나도 모르겠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기도 뭐해서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은혜가 내옆에 다가와 역시 자리에 앉았다. 우리 부부를 넌지시 바라보고 있던 박태준이 그제서야 김상욱을 슬그머니 밀어내며 고이 그 보기좋은 미소와 함께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제서야 나머지 ’치‘들도 천천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탐색전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 얼마동안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말없이 한두잔 양주를 꼴깍꼴깍 받아 마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어색한 기운을 깬건 박태준이었다.



“지훈씬, 무슨일 하세요?”

-아.. 아 저요? 저는 뭐 그냥...



박태준의 갑작스런 질문에 숨이 탁하니 막혀온다. 제길, 왠지 이 질문도 고의적으로 한 것같은 느낌이다. 슬쩍 고개를 돌려 은혜를 살필까 하다가, 그냥 당당히 회사 상호와 직급을 또박또박 한글자씩 말했다. 절대 모를까봐 그런게 아니야. 그러자 병길과 상욱 길수가 잠시간 미간을 찌푸리며 무슨 생각인가에 잠겨버린다. 그래 생각해라. 생각해. 그리곤 닥치고 아무말도 하지말아라. 제발. 하지만 왠일인지 박태준만은 손에 들려있던 술잔을 가볍게 내려놓고선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다시 말을 잇는게 아닌가?





“아. 그 회사라면 저도 잘 알지요. 목제 가구를 납품하는 회사 아닌가요?”

-아.. 어.. 어떻게 잘 아시네요? 하하

“네, 제 기억이 맞다면 저희 부친께서 아마 몇 번인가 지훈씨 회사와 거래도 하고 그랬을 겁니다.”

-아.. 아 네.

“아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제가 온양에서 사업차 꽤 오래 머무를 계획이거든요. 이 호텔도 저희 아버지 소유긴 한데, 가구가 썩 맘에 들지 않았거든요. 잘 됐네요. 이참에 지훈씨 회사와 거래하는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네? 아.. 아 네. 그..... 그런 계약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 부분이 아니라서...



보아라. 인간이란 이렇게 나약한 존재다. 방금전까지 적대감 가득한 눈으로 상대를 쏘아보던 나 자신은 온데간데 없고, 돈에 굴복해서는 눈을 또롱또롱 뜨고 있는 나라는 녀석은 정말.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는 최길수와 눈이 마주치고는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슬쩍 내리 깔며 아내의 얼굴을 확인하자, 은혜는 나와시선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스윽 돌려버린다. 아 젠장.





4. The game





경제적 강자든 약자든, 궁극적으로 술앞에서는 ‘평등’해 지는 모양이다. 박태준이 준비한 3병의 양주를 꼴깍꼴깍 넘기다 보니 나는 물론이고 박태준 일행도 조금씩 긴장이 풀어지는게 눈에 들어온다. 평소에 먹지 않던 ‘비싼술‘을 연거푸 들이켜서 그런지, 정신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어질어질해 진다. 나를 제외한 남자들의 시선이 주기적으로 내 옆에 앉아있는 은혜의 몸에 끈적하게 꽂혔다 말았다를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릴 수 있을만큼의 정신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는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특히 그 ’잘나신 평론가’ 김상욱이라는 자와 병길의 나의 아내에 대한 시선은 여간 노골적인게 아니었다. 에이 재수없는 놈들.



시간이 궁금해 슬쩍 고개를 돌리는데 옆에서 얼굴이 벌개진체 베시시 웃고 있는 은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체육학부 출신으로 나보다도 술이 쎈 은혜가 술에 취했던 적은 내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런 은혜조차 취한채 베시시 웃고 있는 꼴이라니, 과히 양주가 괜히 양주가 아닌 모양이다.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만 일어날까 싶은 마음에 슬쩍 자리에서 다리를 들어 일어나려는데, 내 옆에 앉아있던 병길이 무언가 낌새를 채곤 내 곁에 바싹 다가와 앉는다. 뭔일인가 싶어 병길을 떼어 놓으니, 병길이 무슨 생각에서인지 실실 쪼개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한다.



“에이, 에이. 우리 너무 재미없게 논다. 에이~ 그러지말고 우리 간단하게 게임이나 해요!”

-게임이요?



병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박태준이 흥미롭다는 듯 손에 들린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박태준이 반응을 보이자,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병길이 침을 튀기며 이런저런 얘기를 쏟아낸다. 귀찮기도 귀찮고 시끄러운것도 시끄러워서 이내 병길의 말을 막고 그만 일어나겠노라고 했더니, 왠일인지 옆에 앉아있던 은혜가 ‘분위기 깨지말고 앉아있어’라며 면박을 주는 통에 얼굴을 구기며 잠자코 병길의 이야기를 들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난 아는 게임이 별로 없는데.”



병길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박태준이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자 병길이 다급하게 간단한 게임부터 하자며 ‘베스킨 라빈스’를 추천하고 나선다. 미친놈. 대관절 그게 언제적 거냐? 한심한 표정으로 병길을 바라보니, 왠일로 아내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이 흔쾌히 찬성을 하고 나섰다. 제길 내편은 아무도 없는건가!



“자 그럼, 저부터 시작할게요! 1,2!!”



병길부터 시계방향으로 천천히 게임이 시작되었다. 불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던 나는 그저 ‘여론’이 몰아가는 대로 몸을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방금전 박태준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흘러나온 ‘대형계약’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아이... 또 걸렸네.“



옆자리에 앉아있던 은혜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온다. 병길이 신나서 벌주로 말아놓은 양주 한컵을 또 은혜에게 건낸다. 맨 처음에 병길이 걸린 이후로는 벌써 네잔연속 은혜가 걸리고 있는 형국이다. 그도 그럴것이, 베스킨 라빈스라는 게임의 특성상 이건 마음만 먹으면 특정인을 소위 ‘골로’ 보낼 수 있는 게임이다. 두세번 걸릴땐 그러려니 했는데, 상황을 지켜보니 병길과 상욱이라는 작자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걱정스런 마음에 고개를 돌려 아내의 표정을 살피자니 말릴틈도 없이 벌써 ‘네잔째’ 잔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었다.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입맛을 다시는 은혜의 표정은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내 와이프가 이토록 취했던 적이 있었던가?.... 단언컨대 없다.



그런 은혜를 유심히 바라보던 병길이, 은혜의 손에 들려져있던 잔을 건내받으며, 다시금 ‘벌주‘를 말기 시작한다. 왠지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에, 병길을 저지해 보려는데, 병길이 내 귓가에 대고 ’막잔‘ 이라고 속삭이는 바람에, 아내말대로 ’분위기 깨기 싫어‘ 병길이 하는대로 놔두었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하지요!! 1!!”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이미 31까지의 숫자는 한바퀴를 돌아 두바퀴를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 오른편에 앉아있던 최길수의 차례가 되었을때, 최길수가 잠시 뜸을 들이다 침묵속에서 이내 천천히 입을 연다.



“3... 30!!”

-아!!



최길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혜가 크게 탄식을 내뱉는다. 술에 취해서인지, 아니면 기분탓인지 아내의 큰 탄식이 ‘교성’처럼 들린다. 그러자 병길이 히죽거리며 벌주를 아내에게 건내는데, 이미 4잔을 들이킨 아내로써도 5째잔이 부담되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병길의 손을 보는 아내의 표정이 조금 굳어진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남자들이 그런 아내의 표정을 살피자니, 돌연 반대쪽에 앉아있던 박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내의 손에 들린 벌주를 뺏어서는 벌컥벌컥 들이키는게 아닌가? 취해있는 아내는 물론이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이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그저 의아한 표정으로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내 옆에 앉아있는 병길이 그런 박태준을 바라보며 안절부절 못하는게 눈에 밟혔다.



“캬아. 보기 안쓰러워서 그냥 제가 대신 마셨습니다.”

-우와 사장님 멋쟁이!!!



박태준이 벌주를 벌컥벌컥 들이키자, 병길을 필두로 여기저기서 짝짝거리는 박수소리가 울려퍼진다. 술기운때문인지 괜시리 묘한 기분이 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앉아있자니, 옆에 앉아있던 은혜마저 해맑게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다. 하아. 나는 조금 표정이 굳어져서는 박태준을 향해 마지못해 박수를 건냈다.



“자 그럼 ‘사장님‘. 제수씨 보시고 소원 말씀하셔야죠”

-뭐?



병길이 번죽좋게 박태준을 향해 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도 차지 않는다. 누가 니 제수씨냐? 게다가 지가 좋다고 벌컥벌컥 마셨는데, 소원은 무슨놈의 소원? 불편한 표정으로 병길을 쳐다보다가 바로 박태준을 바라봤다. 그래도 지금까지 행동을 보아온 결과 ‘의식’이 있는 놈 같으니까.



“그래요? 그거 재밌겠는데요?”



취소. 이런 빌어먹을 놈아. 재미는 무슨. 하아. 정말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내가 자신을 쏘아보고 있다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박태준은 잠시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조금 비틀거리며 벽에 걸린 컴퍼넌트로 가서 무슨 음악인가를 틀었다.



“오! 이거슨 lmfao의 rock the beat!!!”



노래의 간주부분이 흘러나오자 이내 기다렸다는 듯, 소소한 음악 평론가 김상욱이의 입에서 노래에 대한 소개가 흘러나온다. 어차피 관심도 없어서 애써 무시하고 있는데, 다시금 비틀거리며 자리로 돌아온 박태준이 그런 김상욱의 말을 끊어버리며 천천히 입을 연다.



“음.. 내 소원은.”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전자음을 뚫고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박태준의 입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상한 거 시키기만 해봐라. 가만두지 않을테다.



“지훈씨 부부가 음악에 맞춰서 1분간 ‘부비부비’ 하는 겁니다”

-와!!!



태준의 말에 나는 잠시간 내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그게 가능할거라 생각하고 말하는 걸까? 내가 미간을 찌뿌리고 박태준을 바라보자니, 그가 연신 싱글생글 거리며 우리 내외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마치 ‘지금 내가 한말 못들었니?’ 하는 표정으로. 당혹해서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나의 오른손을 누가 힘껏 끌어당기기에 놀라서 올려다보니, 내옆에 앉아있던 은혜가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허리를 숙인채 힘껏 내 손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당황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앉아있는데, 그런 은혜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쩐지 조금 허전한 느낌이 든다. 그제서야 은혜의 허리춤에 걸쳐있던 갈색담요가 허리춤에 없다는 걸 알아챘다. 놀래서 주위를 살피는데, 나를 보고 허리를 숙인 은혜의 뒤쪽에서 김상욱과 박태준의 비서라는 최길수라는 자가 얼굴에 홍조를 띄고선 아내의 ‘뒤’에 시선을 고정한채 앉아있는게 아닌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당장이라도 한마디 하려는데, 나를 끌어올리는 아내의 힘이 일순간 더 쎄지는 바람에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고 말았다.



‘평소에 이런적이 없었는데.’



나를 이끌고 원을 만든채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사내들 틈으로 들어간 아내가, 나에게 등을 보이고 서더니 천천히 허리를 나의 허리춤에 밀착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그만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점차 커지는 사내들의 박수소리와 동시에 은혜가 내 앞에서 요란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수영복 차림의 나는 아내의 엉덩이가 나의 그곳에 닿자, 마음과는 달리 얼굴이 발개지며 나의 페니스가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생면부지의 남앞에서 그것도, 한명도 아닌 여러명의 남자들 앞에서 춤을추는 아내와 남편. 뻣뻣하게 굳어버린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서있자니, 은혜는 나의 의사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빠르게, 그리고 음악의 비트에 맞춰 정확하게 허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이미 1분이 훌쩍 지난 시간임에도 아내와 나의 섹시댄스는 그칠줄을 몰랐다. 시작과 동시에 박수를 쳐대던 남자들도 이젠 박수마저 잊은채 그저 멍하니 나와 아내를, 아니 그저 후드티 차림으로 맨발에 맨다리로 연신 요염하게 춤을 추는 아내에 시선을 꽂아 넣고서는 좀체 거둘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나대로, 아내를 알고 나서 한번도 보지 못했던 아내의 ‘처음보는’ 모습에 점차 말못할 흥분감에 흠뻑 도취되고 있었다. 그래 솔직히 지금 이대로라면 부끄럽지만 ’쌀것‘같았다. 그것도 아주 잔득. 그저 눈을 감은채 넌지시 아내의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입술을 꾸욱 깨물자니 그제서야 음악이 꺼졌다.



“자.. 잘 봤습니다.”



박태준이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음악을 끄자, 그제서야 한참을 내 자지를 문지르던 아내의 엉덩이의 움직임이 그쳤다. 그러자 병길이 아쉬운듯 입맛을 다시기 시작한다. 나는 잔득 발기한 나의 자지 때문에 괜시리 부끄러워져, 잔득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은혜의 뒤에 꼼짝없이 붙어서는 천천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서둘러 은혜의 자리에 떨어져있던 갈색 담요를 은혜의 맨다리위에 걸쳐 주었다. 그러자 연신 아내의 다리를 훔쳐보던 김상욱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게 보였다. 하아 이젠 어떡한다.







5. 해서는 안될 게임.





겨우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켰을 무렵, 방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잦아들었다. 슬쩍 시간을 보니 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마음같아선 그만 가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왠일인지 쉽사리 입밖으로 그말이 흘러나오지 않는다. 마음과는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곤, 병길이 건내는 술잔을 그저 말없이 들이키는 것이 전부였다.

옆에 있던 병길이 나를 슬쩍 보다가 돌연 입을 열어 어색한 분위기를 걷어내려 했다.



“자 그럼 ‘베스킨 라빈스’는 ‘일단’ 그만하기로 하구요. 다음 게임은!!“

-뭐?



병길의 말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반응을 하고 말았다. 그러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나를 쳐다본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리자, 술이 달아오르는지 괜시리 부끄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은혜가 옆구리를 툭툭 치는 탓에 사람을 무안하게 만든다. 제길 이게 누구 때문인데.



“확실히, 흑기사가 게임의 흥을 돋구긴 하네요. 큭큭. 그래서 말인데 이번엔 왕게임 어떤가요?”

-왕게임이요?



아뿔싸. 병길이 이자식이 이제는 대놓고 지랄이다. 아까 스파앞에서 마주쳤을 냉정하게 돌아섰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빠르게 머릿속을 파고 들어왔지만, 지금 상황에선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병길은 간단하게 게임룰을 소개하고선 바로 벌주를 말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바에야 룰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병길이 벌주를 모두 만들었을때, 다시금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미 술이 들어갈대로 들어간것도 모자라, 이미 어느 젊은 부부의 ‘질펀한 댄스’도 감상한 터라 다들 이미 정신이 없어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다. 나로써도 그저 병길의 호쾌한 말소리가 간헐적으로 귓가에 들려올 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 거실 가득 병길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나는 내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와.. 이런 제가 왕이네요!! 큭큭. 그럼 제가 시키는대로 다들 따라해 주세요! 박태준 사장님과 우리 제수씨 앞으로 나와 주세요!”



잠깐 잠깐 잠깐, 내가 대학 다니면서 게임을 그리 많이해본건 아니지만, 왕게임의 룰이 이렇지는 않았던것 같은데. 대관절 영문을 몰라 병길을 보다가 이내 내 오른편의 움직임이 방금전과 마찬가지로 분주해지기에 놀라서 고개를 황급히 돌리니, 이미 은혜가 생글생글 웃으며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가는게 보였다. 이건 아니지 싶은데. 게다가 방금전과 마찬가지로 아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무릎에 올려 놓았던 갈색 담요가 스르륵 하고 자리에 떨어져 버렸다. 덕분에 다시금 수영복 차림의 매끈한 다리를 그대로 생판 모르는 남자들에게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었다. 내가 맨다리 차림의 아내에게 가져다 줄 요량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아내의 자리에 덩그러니 놓인 갈색 담요를 집어들려 하는데, 순간적으로 최길수라는 작자가 갈색 담요를 집어서는 나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슬그머니 떨구어 놓는게 아닌가? 순간 내 눈을 의심한 나는 최길수를 뻔히 쳐다봤지만, 그자는 애써 시선을 회피하려는 듯 그의 두 눈을 나의 아내에게 꽂아넣고 있었다. 무슨 말이던가를 하려던 나는 아내와 마찬가지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박태준을 바라보며 이내 말문을 굳게 닫아 버렸다.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병길이 무슨 생각에서 인지 방안으로 뛰쳐 들어가더니 기어이 잠시후 낑낑대며 이불 하나를 가지고 거실로 나오는게 보였다. 무슨 영문인가 몰라 그저 물끄러미 병길을 바라보자니, 이불을 태준에게 공손히 건낸 병길이 다시금 자리에 앉아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제 소원은. 음. 큭. 음 3분동안 제수씨랑 박사장님이 저 이불속에서 ‘뭐든’ 하는 겁니다. ‘뭐든!’ 큭큭”

-야... 뭐.. 뭐라구?



순간 내 귀를 의심한 나는 병길을 거의 때릴 기세로 바라봤다. 그러자 병길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순식간에 거실에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깨버린건 애석하게도 나의 아내, ‘은혜’였다.



“아... 아.. 진짜... 사람 찌질하기는... 그냥.. 그냥 게임인데 뭐 어때?”

-무.. 뭐라고?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취한 표정의 아내를 쳐다보자니, 박태준을 제외한 나머지 남자들이 숨을 죽인채 나와 아내를 번갈아가며 바라보고 있다. 그런 분위기가 익숙치 않았는지 아내 옆에 이불을 든채 서 있던 박태준이 간신히 운을 땐다.



"그래요, 병준씨.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그건..“

-에이, 그런게 어딨어요. 벌칙인데. 제수씨 말씀대로 게임일 뿐인걸요.



태준의 손에 들린 이불을 뺏어들며 바닥에 펼치는 아내를 보며 나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런 아내와, 조금은 경직된 표정을 지어보이던 박태준을 남자 세명이 번갈아 바라본다. 그리곤 이윽고 거실에 남자세명이 만들어내는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잊고 있었다. 아내도 취했고, 나도 취했고. 그리고 여기엔 내 편도 없다.



은혜가 바닥에 펼쳐놓은 이불 속으로 먼저 몸을 쏘옥하고 집어넣고 병길을 향해 ‘시간을 잘 세라’는 말을 건내자 병길이 거세게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거의 마지막 희망으로 멀뚱멀뚱 서 있는 박태준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멋쩍게 웃어보이며 아내가 먼저 들어가있는 이불 속으로 몸을 천천히 구겨 넣는다. 이불 속으로 아내와 태준이 들어가 두 사람의 실루엣만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만큼이 되었을때, 병길이 천천히 시작을 외쳤다. 이미 거실에는 미칠듯한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 몇초간은 이불속에서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로썬 그저 다행이지 싶었다. 하지만 이불이 한번 공중으로 스윽 올라갔을때 내 일말의 안도감과 기대감은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분명 저 움직임은, 태준이 아내의 몸 위로 올라타고 있다. 차라리 내 생각이 틀리길 바랬지만, 이미 숨을 죽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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