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게시판] 나의 터프한 아내(The valley) - 중편 - 딸타임

나의 터프한 아내(The valley) - 중편

7. 산책로 (散策路)





펜션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일어나자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술이 그렇게 약한편은 아닌데, 평소에 언감생심 꿈도 못꾸던 양주를 어제 그렇게 들이켜서인지 머리가 연신 지끈거린다. 관자놀이를 꾸욱꾸욱 눌러가며 수영복 차림으로 침대옆에서 잠들어버린 아내의 모습을 훔쳐보니, 꿈만같았던 -아니 차라리 악몽같았던- 지난 새벽의 일들이 빠르게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제길, 별 시덥지 않은 놈을 만나서는 지랄같은 일을 당했다. 덕분에 아내와 방안에서 오붓하게 지내리라던 원래의 ‘계획’은 보기좋게 틀어져 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돌아누운 아내의 풍만한 엉덩이를 슬쩍 주물러본다. 그러자 간밤에 나의 자지앞에서 엉덩이를 흔들어대던 모습과, 태준과 이불속에서 끙끙대던 아내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나의 자지가 빠르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연애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적극적’인 모습의 아내는 본적이 없었는데, 대관절 어제 새벽에 나의 눈에 보여진 아내의 모습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아내의 엉덩이를 연신 꾸욱꾸욱 주무르자니 그제서야 아내가 뒤척이며 눈을 슬그머니 뜨고 있는게 보인다.

햇살을 받아 눈을 찡그리며 나를 올려다보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니, 과히 나의 아내가 예쁘긴 하다. 간만에 연애초기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 나는 그윽하게 아내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잘잤어?”

-그럴 리가 있냐?



취소. 하여튼 무드라곤 찾아볼 수 없는 년. 백퍼센트 확실해졌다. 어제 나를 포함한 남자들에게 보여줬던 몸부림은 단순한 '취기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빈정이 상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슬쩍 시간을 확인하니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제길 계획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다 싶었다. 아침 일찍 근처에 있는 온천에 가서 반나절 정도는 있을 계획이었는데, 지금 간다고 해도 인파로 바글바글할게 불보듯 뻔했다. 슬그머니 지금까지의 경제적 비용을 생각하자니, 지금이라도 서둘러 온천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 은혜와 함께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어제 스파에 갈때와는 다르게, 아내와 나는 간단한 외출복 차림을 하고서 길을 나섰다. 미리 알아본 바로는 펜션에서 10분정도 거리에 온천이 있다. 어차피 복장이야 몇 푼 주고 대여해 입으면 그만이겠지라는 생각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데, 펜션앞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 사내가 터벅터벅 우리쪽으로 걸어오고 있는게 보였다. 누군가 싶은 생각에 미간을 잔득 찌푸리고 그의 얼굴을 살피자, 천천히 그의 이름 세글자가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최길수’



건장한 체격의 사내의 정체는 박태준의 개인비서인가 뭔가 하던 놈이었다. 어제 새벽에 나를 보고 어색하게 인사하던 그놈. 다시는 볼일이 없을거라 생각했던 그 놈이 우리 부부 앞에 다가와 서자, 나는 물론이고 왠일인지 은혜의 표정도 순간 굳어지고 있는게 보였다. 우리 앞에 서서 은혜와 나를 번갈아가며 살피던 최길수는 -그마저도 역시나 아내를 더 많이 바라보고 있는게 역력했지만- 가볍게 헛기침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저희 사장님께서 두 분과 식사를 하고 싶어하셔서 말씀입니다.”

-네? 식사요?

“예, 아무래도 사장님께서 간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여간 마음이 쓰이시는게 아닌가 봅니다. 초면에 밤늦은 시간까지 너무 무례를 범한것 같다시며 밤새 한잠도 못 주무셨습니다.”



지나치게 사무적인 뉘앙스의 최길수의 말을 듣고 있노라니, 말못할 거리감이 느껴졌다.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흡사 기계처럼 박태준의 뜻을 전하고 서 있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는데, 옆에 서 있던 은혜가 돌연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그런 은혜를 보자 괜한 치기가 발동했는지 나는 최길수를 바라보며 흔쾌히 ‘박태준’의 초대에 응해버렸다.







“어서 오세요. 자리에 앉으시죠”



최길수를 따라 얼마간 걸어가니, 딱 보기에도 비싸보이는 음식점 안에서 어제와는 조금 다른 모습의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부부를 반겼다. ‘밤을 샜다’던 태준의 얼굴은 최길수의 말과는 달리, 구두약을 칠해 빤질빤질 광이라도 나는 듯 했다. 이에 반해, 온천에 갈 요량으로 고이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태준앞에 선 나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없나 하는 심정으로 연신 주위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나를 은혜가 부끄럽다는 듯 외면해 버린다. 에이 더러운 물질의 노예. ㅤㅌㅞㅅ.



자리에 앉자 최길수는 박태준을 향해 인사를 건낸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개인비서라니, 술이 깬 마당에 처음으로 박태준이라는 자가 한없이 부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 당연히 있어야할 빈대같은 강병길과 김상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의아한 얼굴로 태준을 바라보니 태준이 다시 스윽 웃으며 강병길과 김상욱이 아침일찍 근처 온천에 갔다며 먼저 너스레를 떤다. 모르긴 몰라도 하루종일 있을거라고 말한뒤에, 자신도 이따가 온천에 갈 계획이니 나도 같이 가자고 말을 걸어온다. 어제 새벽과 마찬가지로 눈 앞의 박태준이라는 작자는 어떤 면에선 참 묘한 ‘힘’이 있는 남자다. 당췌 말을 듣고 있는 상대로 하여금 ‘거절’따위 하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힘. 나는 그저 얼굴을 붉히며 그러겠노라고 말해 버렸다.



얼마간의 이야기가 오고가자, 주문했던 음식이 나왔다. 드라마에서 볼때면 항상 혀를 차던 -그러니까 고작 저 정도의 양을 위속에 쑤셔 넣는다고 해서 사람이 잔득 포만감을 느낄쏘냐? 했던 고가의 스테이크 조각- 그 ‘음식‘이 눈앞에 펼쳐지자, 다시한번 말할 수 없는 위화감에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 맛있게 드시라는 박태준의 말과 함께 나와 은혜는 나란히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나저나, 어제는 너무 죄송했어요.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병길씨가 조금 짖궂은 감이 있어서, 저도 모르게 결례를 범했습니다.”

-아.. 아 예.

“그래서 말인데, 혹시 어제 잠시 나눴던 사업 이야기 기억하세요?”

-네... 네? 사.. 사업이요?



기억나지. 기억나고 말고 이 양반아. 당신이 혹시나 까먹으면 어쩔까하고 내심 마음 졸이고 있던 참이었어.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입밖으로 친히 그 이야기를 꺼내주시다니.



“네, 그 지훈씨 회사와 관련된 사업 이야기요. 혹시 기억 못하시는건..”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저는 솔직히 ‘박사장‘님이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하신 말씀인 줄 알고...



돈앞에 굴복하는 나는 더러운 물질의 노예. 어느새 박태준을 향한 나의 호칭은 ‘박사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하하. 지훈씨도.. 낯간지럽게 사장이라니요. 그냥 편히 부르세요. 병길씨 친구시면 다 같은 또래인데요.”

-아.. 아예.. 그.. 그렇죠?



하지만 가지고 있는 돈에는 ‘또래’가 없어. 그게 함정이야.



“어제 한숨도 못자면서 생각해 봤는데요, 아무래도 ‘어젯밤의 결례’도 있고 이번 가구 납품을건을 지훈씨 회사에 부탁하고 싶은데. 휴가 끝나고 돌아가시면 사장님과 잘 얘기하셔서 간단한 업무계획서나 자료들을 저희 쪽으로 보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저희도 일단 명목상 검토는 해 봐야 하니까요”

-아... 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저 얼떨떨하게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쥔채 태준의 ‘거대한 호의‘를 받으며 박태준을 바라보고 앉아있노라니, 그제서야 박태준이 ’어젯밤의 결례‘라는 말을 곱씹으며 아내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왠일인지 은혜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벌써 몇분째 말이 없다. 고기를 먹는둥 마는둥 하면서.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나는 이내 박태준이 하는 말을 ’조금‘이라도 흘려 듣지 않기 위해, 아내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금 그의 말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씨알’만한 스테이크 한점을 마치 분쇄시키듯 잘근잘근 씹어먹고 밖으로 나오니 태준이 밝게 웃으며 소화도 시킬겸 산책로를 따라 걷자고 말을 붙여온다. 아닌게 아니라, 태준의 뒤편으로 딱 보기에도 경치 좋아보이는 산책로가 눈에 들어온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대형계약이 오고가는 마당에 괜시리 잠재적인 ‘고객’의 심사에 어긋날 필요는 없겠다 싶어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아내의 표정을 살폈는데, 연신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디 아파?’

-아니야, 신경꺼 오빠.



남은 기껏 걱정되어 물어봤건만, 돌아오는 말이 저 모양인 걸보니 어디 딱히 아프진 않은 모양이다. 박태준의 뒤를 따라 산책로 입구까지 다가가니, 그제야 어딘가에 있던 그의 비서 최길수가 성큼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게 보였다. 다시금 박태준을 향해 목이 꺾여라 90도 인사를 건내기가 무섭게 그가 내 옆에 다가와 서는게 아닌가? 무슨 영문인가 싶은 생각에 빤히 최길수를 쳐다보는데, 이내 그가 내 팔을 잡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 산책로는 사실 저희 아버지 소유거든요. 최비서랑 저는 어려서부터 친구나 다름없는 존재라, 가슴이 답답할땐 종종 이 산책로를 같이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곤 했죠. 최비서가 이곳 산책로라면 저보다도 잘 알겁니다.”

-아.. 아예..



'자네 세계'에서는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우리 세계’에서는 그런걸 자랑이라고 한다네.

지리를 잘 알고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고, 제발 내 팔에서 손 좀 빼주겠어? 어쨌든, 내 팔에서 느껴지는 최길수의 묵직한 손의 느낌으로 짐작컨대 최소한 내가 힘으로 이 남자를 이길 재간은 없어보였다. 그저 최길수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와 최길수가 나란히 걷고, 그리고 바로 뒤에 은혜와 박태준이 나란히 따라 걷는 형국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은혜의 남편이 아니라 태준이 그녀의 남편이라 생각해도 할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최길수의 손에 이끌려 걸으며 가끔씩 고개를 슬금슬금 돌려 아내와 태준의 모습을 간간히 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얼마간을 말없이 걸어가니, 상쾌한 기분이 드는것도 같다. 하지만 어쩐지 최길수의 발걸음에 맞춰 걷자니 숨이 조금씩 차오르는 기분이다.



“저.. 저기요. 좀 천천히 걸으면 안될까요? 걸음이 너무 빠르신데”

-이 정도는 걸어 주셔야죠.



‘이 정도’는 다분히 니 기준이겠지. 숨이 차올라 죽을 지경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종종걸음을 걷고 있는 최길수라는 사람에게 더 이상 말해봤자, 씨도 안먹힐것 같아 나는 체념하고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뿔싸 박태준과 나란히 걷고 있는 아내와의 간격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벌어져 있다. 이젠 차라리 최길수에게 끌려가다시피 하고 있는 내가 무표정한 얼굴의 최길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이내 그만두고 다시금 고개를 돌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은혜와 박태준의 모습을 확인했다. 나란히 걷고 있는 은혜와 박태준이 필요이상으로 너무 찰싹 달라붙어 걷고 있는게 조금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왠지 얼굴에 연신 미소를 띄우며 웃고 있는 박태준의 잘난 쌍판대기를 스윽 확인하고는,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숨을 헐떡거리며 최길수와 함께 산책로를 걷고 또 걸었다.



숨이 차올라 어느 순간부터는 아내와 박태준이 내 뒤를 좇아오는지 어떤지 확인할 틈도 없이 그냥 무작정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조금 놀랍다 싶은건 내가 이토록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내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최길수라는 작자는 조금의 흐트러짐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괴물같은 놈.



“학. 학.. 저기 미안한데요. 하아. 조금만.. 조금만 쉬어요. 우리 하아. 벌써 20분째 걷기만 했어요.”

-........



내가 거의 죽을듯한 얼굴로 차라리 애원에 가까운 부탁을 쏟아내며 바닥에 주저앉자, 최길수도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고 스윽 나를 바라본다. 이럴줄 알았으면 평소에 은혜 따라서 운동이라도 조금 할걸 하는 후회가 밀려든다. 바닥에 주저앉아 연신 씩씩거리며 뒤를 바라보는데, 당연히 나의 뒤를 따라 걷고 있을줄 알았던 아내와 박태준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숨도 차고 그리고 나와 최길수 쪽의 걸음이 상대적으로 그들보다 빨랐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숨을 고르며 아내와 박태준이 오기를 기다렸다.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한곳에 시선을 고정한채 있자니, 쉼호흡이 안정되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기에 고개를 들어 슬쩍 최길수를 바라보니, 이게 웬걸 최길수도 나와 같은곳을 바라보고 있다. 불현듯 느낌이 좋지 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나 걸어왔던 길을 다시 뛰어 돌아가니, 내 뒤편에서 깜짝놀라 내 이름을 부르는 최길수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제길, 최길수에 이끌려 아무생각도 없이 걸어왔을땐 몰랐는데, 산책로를 따라 무성한 초록의 풀들이 여기저기 솟아있다. 말이 좋아 풀이지 차라리 숲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무성한 풀들이었다. 불안하고 '좋지 않은' 생각들이 연신 머릿속에 파고들자, 길을 따라 달리는 나의 발걸음도 무서운 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뒤로 돌렸을땐 이미 최길수의 모습따윈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간을 미친듯 달리고 나서야, 숨을 헐떡 거리며 바지춤에서 휴대폰을 꺼내 아내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지금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잠시후 소리샘으로...”

-제길!!



아내의 전화기가 꺼져 있는 것을 학인하자, 불안하고 ‘옳지 못한’ 생각들이 배가되기 시작했다. 아직 눈으로 확인한건 아무것도 없다. 단정짓지 말자. 뭐 그따위의 생각들로 숨을 고르며 나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쓰고 또 애썼다. 하지만 그게 쉬운일이 아니잖나. 나는 다시 눈에 불을 켜고 인적이라곤 좀체 찾아볼 수 없는 산책로를 마구 뛰었다.



얼마간을 달려 다시금 거친숨을 내쉬며, 대답하지 않을걸 알면서도 애써 아내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내의 목소리 대신 ‘익숙한‘ 여자의 ’단조로운‘ 목소리톤이 귓전에 맴돌자, 나는 산책로 바닥에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내동댕이 쳐 버렸다. 그리곤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산책로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서는, 벌써 몇분째 급속하게 나의 머릿속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는 ’좋지못한‘ 생각에 머리를 감싸쥐고는 체념하듯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지훈씨?”

-아?



그렇게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산책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내앞에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는것이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들자니 박태준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게 아닌가. 내가 박태준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내 그의 곁에 있어야할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짧게 아내의 이름을 내뱉자, 그제서야 박태준이 생긋거리며 입을 여는게 보였다.



“은혜씨가 아까 먹은 스테이크가 소화가 덜 됐는지, 잠깐 쉬고 싶다 하셔서요. 방금전까지 옆에서 같이 있다가 저더러 괜찮으니 먼저 올라가라 하셔서 저 먼저 올라오는 길입니다. 어차피 여기부턴 갈림길도 없고 길이래봐야 하나밖에 없어서 해매거나 하실일은 없겠다 싶어서.....”

-아... 아... 그.. 그래요?



솔직히 박태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순 없었지만, 차라리 그의 말이 사실이길 바랬다. 나는 그런 박태준의 말을 묵묵히 듣다가 짧은 목례를 보내고는 서둘러 아내를 찾아 다시금 산책로를 걸었다. 그래도, 은혜의 얼굴을 봐야만 마음이 진정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조금은 여유가 생겼는지 숨이 차지 않을만큼의 보폭으로 천천히 산책로 여기저기를 훔쳐봤다. 혹시나 아내가 있지 않을까. 대관절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얼마간을 더 걸어가니 산책로 옆의 바윗돌 위에 은혜가 앉아있는게 보였다. 미칠듯한 반가움에 잰걸음으로 은혜의 앞까지 다가가니 은혜가 조금도 놀랍지 않다는 표정으로 나를 건조하게 쳐다본다.



“아프다며? 어디가? 체한거야?”

-뭐하러 내려왔어? 별일 아니니까 그냥 신경쓰지 말고 가자. 이제 괜찮아졌으니까..

“저.. 저기...”



하얀색 반바지 차림의 은혜가 바위 위에서 일어나며 나를 두고 천천히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그런 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아내의 걸음걸이가 어제 새벽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어색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엉덩이 부분이 흙과 풀따위로 잔득 더럽혀져 있는 것도 눈에 밟힌다. 괜시리 느낌이 이상해진 내가 아내의 뒤를 따라 걸으려는데, 바위 옆의 풀숲에서 무언가가 눈에 띈다. 점점 멀어지는 아내의 뒷모습을 슬쩍 확인하고 괜시리 떨리는 가슴으로 그쪽으로 다가가서 풀숲을 이리저리 헤집다 보니 가지에 덩그러니 걸려있는 ‘무언가’가 차츰 뚜렷하게 나의 눈에 들어온다. 가지에 대롱대롱 걸려있는 그것을 한손으로 조심스레 올려들었더니, 나의 심장이 다시금 미칠듯 뛰기 시작했다.



“으... 은혜.... 패... 팬티..”



혹시나 아닐까 싶어 이리저리 들춰 보았지만, 그것은 분명 내 아내의 팬티가 맞았다. 아까 오전에 아내가 옷을 갈아입을때 넌지시 눈을 흘겨 확인한 바로는 이것은 일백프로 은혜의 속옷이다. 그런데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이상하다 싶어 아내의 팬티를 이리저리 뒤척이는데 아내의 팬티가 올려져있는 나의 손등으로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전해져 왔다. 양손으로 슬쩍 그 부분을 벌려 확인하니, 아내의 팬티 안으로 멀죽한 액체가 잔득 젖어있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지만 그 정액이 누구의 것인지도 대략 알 수 있는 노릇이다. 그토록 나를 옭아맸던 ‘나쁜 생각’이 현실이 되어 버린 순간이었다. 아내와 박태준이 이곳에서 방금전까지 '섹스'를 나누었다.







손에들린 아내의 팬티를 챙기기도, 그렇다고 그 자리에 스윽 놓고 돌아서지도 못하다가, 입술을 한번 꾸욱 깨물곤 손에 들린 아내의 팬티를 숲속 깊은 곳에 던져버리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아내가 먼저 올라간 산책로를 휘청거리는 두 다리로 간신히 걸어가는데, 머릿속을 파고드는 오만가지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고 또 먹먹해진다. 박태준의 정액이 묻어있는 아내의 팬티, 그리고 어제 새벽에 이어 방금전까지도 절뚝거리며 걸어가던 아내의 비정상적인 걸음걸이, 마지막으로 상기된 듯한 표정의 아내와 박태준의 얼굴. 내가 직접 박태준과 은혜의 ‘성교’를 보지 못했다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정황상 둘은 이미 완전히 몸을 합친게 분명했다. 나는 알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어제 새벽에는 분명 아내의 도발적인 행동에 ‘잠시나마’ 내 몸이 알 수 없는 흥분에 휩싸여 반응했던 것은 인정하지만, 지금만큼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노로 가득찬 상태다. 게다가 잠시나마 박태준의 입에서 흘러나온 ‘비지니스’ 때문에 이성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나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좀체 식힐 수가 없었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한걸음 한걸음 어렵싸리 때고 있는데, 나의 두 눈에 최길수와 박태준, 그리고 은혜가 나란히 걸어오고 있는게 보였다. 자리에 서서 차츰차츰 나를 향해 걸어오는 세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나는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아 지훈씨! 은혜씨는 진작에 올라왔는데, 정작 은혜씨를 찾으러간 지훈씨 모습은 안보여서 조금 기다라다가 이렇게 내려왔어요.”



여전히 머리를 왁스로 반듯하게 고정시켜 세운 박태준이 나를 보며 고이 웃으며 말하는데, 내가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없이 서 있자 그제서야 박태준이 정색하며 나를 조심스레 쳐다본다. 일순간 우리 네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두손을 꼭 쥔채 조심스럽게 아내의 표정을 살폈는데, 왠일인지 은혜의 표정은 평소와 별반 다를게 없었다. 그런 아내의 표정을 바라보자니, 지금 내가 괜한 오해를 하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내와 최길수 박태준 이렇게 세명과, 본의 아니게 대치하는 것 마냥 마주하고 몇분을 서 있자니, 기어이 박태준이 웃어 보이며 다시 무언가를 천천히 말하기 시작한다. 다만 기분탓인지 박태준의 웃음이 어쩐지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훈씨 왠지는 모르겠지만 화나셨나 보구나? 미안해요. 나는 그냥 좋은 뜻으로 산책좀 하러 왔을 뿐인데, 괜히 기분 상하게 했나보네. 미안해요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번번히. 그럼 이렇게 하는건 어떨까요?”



이미 심증에 ‘물증’까지 나온 마당에 뻔뻔하게도 나를 보고 입을 열어 연신 말을 하고 있는 박태준의 말따위 귀에 들어올리 만무했다. 지금이라도 그에게 달려들어 시원하게 욕지거리라도 퍼붓고 싶지만, 역시나 내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나란놈이 그렇지 뭐. 그저 멍한 표정으로 박태준을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웃는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표정으로 바라보자니 박태준이 정색을 하며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조금 걸었다고 땀도 나고 하는데, 온천으로 모실게요. 지금 시간이 오후 한신데, 근처에 있는 스파나 온천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꽤나 붐빌겁니다. 하지만 저희 아버지 '소유'의 온천이 하나 있거든요. 그리로 모실게요.”



나는 그저 대답없이 박태준이 지껄이는 말을 듣고 서 있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톤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박태준의 얼굴표정을 보아하니, 거울 없이도 그를 바라보는 지금의 나의 표정이 대략 어떤 모습일지 느낌이 왔다. 싫다 좋다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박태준을 그저 바라보는데, 가만히 서 있던 은혜가 돌연 대화에 끼어든다.



“아.. 아무리 그래도 벌써 꽤나 신세를 졌는데, 온천까지 가는건...”



무슨 신세? 처음보는 부자 자식한테 기어이 몸을 대주는거? 잘도 지껄이는구나. 나는 박태준을 향해 말을 내뱉는 아내의 얼굴을 쏘아보며 생각했다.



“에이, 은혜씨 그런말씀 마세요. 신세라니요, 서운해지네요. 아 그러지 말고, 은혜씨는 제 방에 있는 실내 온천을 따로 혼자 쓰시는건 어때요?”

-예?

“어제 ‘구경’시켜 드렸죠? 제 방에 있는 실내온천. 그렇게 하세요. 일행중에 따로 여자가 있는것도 아니고 은혜씨 혼자 여잔데, 괜히 혼자 떨어져서 눈치보며 온천에 들어가시는 것보단 그냥 편안하게 실내온천에서 몇시간이고 계시는편이 낫지 않겠어요? 어차피 이따가 늦은 시간까지 제 방은 ‘비어있을’테니까요.”



박태준과 아내가 나누는 대화를 물끄러미 듣고 있노라니, 돌연 부화가 치밀어 견딜수가 없었다. 어제 새벽부터 박태준의 입에서 마치 자기의 와이프인양, ‘은혜’라는 말이 흘러나올때마다 미칠 지경이었는데, 보란듯이 아내를 바라보며 말같지 않은말을 쏟아내는 박태준의 면상을 더 이상 바라볼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 아내의 얼굴에 시선을 꽂아넣고 있던 박태준의 입에서 흘러나온 나지막한 한마디가 내 몸을 막아세운다.



“지훈씨, 그렇게 해도 괜찮겠어요? 지훈씨는 저랑 같이 온천에 가도록 하세요. 어차피 거기에 병길씨랑 상욱이도 있을테니까.”

-그.. 저.. 저는...

“그래야 이번 ‘거래‘ 이야기도 여유롭게, 또 구체적으로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온천에서 한두시간 있을것도 아닐텐데”



정말 더러운놈, 역겨운놈. 상황이 불리해지니깐 결국 꺼내든다는 카드가 고작 ‘돈’이냐? 나는 아차싶은 생각에 분한 마음을 겨우 억누르고 고개를 떨굴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내 박태준이 씽긋 웃어보이더니, 이번엔 최길수와 함께 앞장서서 산책길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마치 ‘이미 나의 욕구는 충분히 풀었으니, 너의 아내에겐 당분간은 관심이 없다’라는 표정으로.







8. 내겐 힘이 없어요...



박태준과 최길수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진채로 아내와 나란히 터벅터벅 산책로를 따라 내려오자니, 좀체 오고가는 대화가 없다. 몇번이고 아내의 얼굴을 바라볼까 했지만, 그럴때마다 숲속에서 발견했던 정액덩어리 팬티가 아내 얼굴과 함께 오버랩되는 바람에 번번히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는 답답함에 무언가를 입밖으로 꺼내려는 순간, 역시나 나보다 먼저 아내가 입을 열었다.



“사람이 왜그래?”

-뭐..... 뭐?

“사람이 왜그러냐구? 아까 내가 얼마나 창피했는줄 알아? 무슨 열 살짜리 꼬마아이도 아니고, 상대방이 배려를 해주면 최소한 감사한 마음 정도는 가져야 하는게 예의 아니야? 되려 왜 씩씩대는 건데?”

-야... 야... 너 지금 그게...

“고작 내 얼굴좀 안보인다고, 그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이야? 오빠 정말 왜그래? 철부지 애야?”



난 원체 욕을 즐겨하는 사람은 아니다. 특히나 그 상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지금 이순간엔,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그것도 가슴깊은 곳에서부터...' 아 씨발'.



별다른 대꾸조차 하지못하고 서 있는 나를 또다시 휑하니 남겨두고선 은혜가 종종걸음으로 산책로를 내려간다. 어이가 없어서 그런 은혜의 뒷모습을 바라보자니, 다시금 내가 무슨 깊은 착각을 하고 있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래 아직 내 눈으로 확실하게 확인한게 아무것도 없는걸’ 이라는 말같지도 않은 결론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나란놈이 그렇다. 하지만 덕분에 어쩐지 기분은 조금 나아진다. 에이씨. 나는 서둘러 아내의 뒤를 따라 산책로를 내려갔다.





산책로 입구에서 쭈뼛거리고 서 있자니, 박태준이 바지춤에서 호텔방의 키홀더를 아내에게 건낸다. 조심스럽게 받아든 아내가 다시한번 태준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건낸뒤, 나는 쳐다보지도 않고 터벅터벅 호텔로 발걸음을 옮긴다. 괜시리 ‘미안하고’ 무거운 마음에 한참을 아내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자니 박태준이 온천에 가자며 길을 안내하고 나섰다. 십여분을 걸어 관리인의 안내를 받으며 간단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최길수가 나와 박태준을 향해 번갈아가며 인사를 건내더니 이내 자취를 감춘다. 그런 최길수의 태도를 조금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자니, 박태준이 나보다 몇걸음 앞서 온천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박태준의 뒤를 따라 온천으로 들어갔다.



“온양에 온천이 많지요? 그 중에서도 여긴 꽤나 비싼축에 속하는 온천이랍니다. 소위 ‘프리미엄’이 붙는. 그래서 저희 아버지께서도 사업상 많이 아끼는 곳이죠. 그래서 생각보다 사람이 많진 않을거에요. 번번이 신세를 끼친 처진데, 지훈씨를 아무곳이나 모실순 없죠.”



알았으니까 닥치고 잘난척 그만해. 나란놈은 이미 속이 빌빌 꼬일대로 꼬여선 이미 당신이 나불거리는 소리 따위 하나도 귓구녕에 안들리는 지경에 이르렀거든.



하얀색 가운을 걸친채로 박태준을 따라 조금 걷자니, 조금 여유가 있어 보이는 탕안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누군가 하고 미간을 찌푸리고 봤더니, 강병길과 김상욱이었다. 그들은 나와 박태준을 보더니 -역시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박태준’을 보더니-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태준에게 싱글벙글 미소를 건내기 시작했다. 아니꼬운 마음에 박태준을 따라서 그들곁에 다가가니, 대관절 몇시간을 탕안에 있었는지 손가락이며 발가락 할것 없이 여기저기가 쪼글쪼글 주름져 있는게 보였다. 언뜻 보기에 주름많은개 ‘샤페이’와 닮은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래.. 솔직히 조금 불쾌했다.



박태준과 내가 나란히 탕안으로 들어가자, 강병길이 나를 보고 히죽대며 인사를 건낸다. 어제부터 정말 친하지도 않은놈이 친한척을 하는통에, 가뜩이나 무겁고 어지러운 마음이 다시금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나란놈도 참 한심한게, 탕에 자리를 잡고 들어가 앉은지 얼마가지 않아, 몸속 구석구석 파고드는 온천의 따스한 감촉에 이끌려 마음이 빠르게 안정되기 시작한다. 제길, 빌어먹을 자연의 신비.



김병길과 김상욱은 박태준을 향해 기다렸다는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이건 애완용 '개'가, 주인의 손에 들린 육포조각을 받아먹으려 갖은 아양을 떨어대는것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역겨운 놈들. 그래도 가끔 내가 ‘신경이 쓰이긴 했는지’ 아내의 안부따위를 물으며 소소한 잡담거리를 나누는 ‘배려’도 잊지 않는다. 고맙구나. 정말



“사실 아버지나 저나, 맘이 동하는 ‘협력사’를 하나 알아내면 정말 '끝까지‘함께 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런점에서 이번에 지훈씨네 회사와 우리 회사간의 거래가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 저는 그저 말단 사원일 뿐인데요..



세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좀체 끼어들 여유가 없어, 아예 그들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턱을 괴고 있자니, 박태준이 슬그머니 사업이야기를 쏟아냈다. 화들짝 놀라 박태준을 바라보니,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김상욱과 강병길이 이에 질세라 경쟁이라도 하듯 한마디씩 보태고 나선다. ‘아 그렇죠? 부친께서도 어마어마한 분이시니까요’ ‘야 임마 지훈아. 너 임마 운 좋은줄 알아 임마’ 뭐 그런 따위의 이야기를. 뭐 애시당초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올리 있겠냐마는 어찌됐든 박태준의 '제안'은 나로써도 솔깃한 것이 사실이었다. 샐러리맨으로써 잘하면 회사내의 입지는 물론, 쥐꼬리만한 연봉도 한큐에 올릴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그렇게 박태준의 말을 들으며 웃는 동안에도, 정말이지 이 찜찜한 기분을 훌훌 털어버리기란 여간 어려운일이 아니었다.



온천에 들어온지도 얼추 2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박태준의 양옆을 차지하고 앉아서는 연신 신나서 떠들어대던 김상욱과 강병길은 제풀에 지쳤는지 곯아 떨어져 있었다. 그들 사이에 앉아 여유를 가지고 앉아있던 박태준도 슬금슬금 눈이 감기는게 보인다. 사실 나도 예정에도 없던 산책을 하고 난 직후라, 몸이 노곤노곤해지고 있던것이 사실이었다. 다만, 박태준의 방에 혼자 있을 아내 생각에 겨우겨우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온몸을 감싸고 있는 온천의 뜨뜻한 물의 감촉에 취해, 내 눈도 조금씩 감기기 시작했다.



얼마간 잠들어 있었을까? 턱밑을 간질이는 온천물의 출렁임에 놀라 눈을 비비고 고개를 돌리니 김상욱과 강병길이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어라? 그런데... 그 사이에 있어야 할 박태준의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나 버린 나는,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박태준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넓디 넓은 온천 안에는 왁스로 바짝세운 헤어스타일의 남자따위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심장이 요동치며 다급해진 나는 행여나 잠들어 있는 병길과 김상욱이 깰까 조심스럽게 탕에서 빠져나왔다. 온천의 여기저기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걸으며 나는 연신 박태준을 찾으려 애썼다. 산책로를 걸었을때와 마찬가지로, 불길하고 ‘나쁜생각’이 다시금 내 머릿속을 빠르게 잠식한다. 한두바퀴를 돌고나서야 박태준이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 나는, 서둘러 온천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행여나 박태준의 개인비서인 ‘최길수’와 마주칠까 조심, 또 조심하며 온천의 화장실, 탈의실 할 것 없이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져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끝내 박태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다급해질대로 다급해진 나는 서둘러 온천 건물 밖으로 나왔다. 불그스름한 태양이 머리위에 내려앉는다.

근처에 있는 시계탑의 시간을 확인하니, 못해도 족히 한시간은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아 왜 그 순간에 긴장감이 풀렸을까. 그대로 그 자리에 서서는 내 자신을 몇번이고 원망해 보았다.

마음같아선 아내가 있는 태준의 호텔로 달려가고 싶지만, 마음 한켠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작디작은 이성이라는 놈이 애써 침착하라며 나를 달래는 통에 차마 그러지도 못하겠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온천 외벽을 따라 걸으며, 혹여라도 박태준이 있을까? 하는 심정으로 박태준을 찾고 또 찾는것 뿐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내 바램은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찾아보자’라는 말을, 연거푸 세 번 외치고 나서야 나는 절망감과 함께 온천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병길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탕근처로 터벅터벅 걸어가니 여전히 박태준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그저 강병길과 김상욱이 시체처럼 탕안에서 입을 벌리고 자고 있는 모습만이 눈에 들어온다. 부끄럽게도 눈물이 날것 같아, 애써 쉼호흡을 한번 크게 들이쉰뒤 아까 내가 앉아있었던 자리로 돌아가 뜨거운 온천물을 맞으며 몸을 담갔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기어이 박태준이 자리로 돌아오고 있는게 보였다. 놀란 내가 박태준을 올려다보니, 박태준도 깨어있는 나를보고 짐짓 놀란 표정을 보이다가 황급히 나로하여금 시선을 거두어 들인다. 왜 내 시선을 피하는거지? 그리고 왜 내 가슴은 또 이렇게 뛰는거야? 탕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박태준을 바라보며 무슨말인가를 하려 하는데, ‘고맙게도’ 눈을 비비며 일어나는 병길이가 태준을 바라보며 ‘어디갔다왔냐’고 나를 대신해 묻는다.



“아.. 아.. 죄송해요. 갑작스럽게 아버지한테서 연락이 와서, 요 근처에서 전화좀 받고 왔어요. 많이들 주무셨나요?”



웃기지마, 이미 니 말대로 이 근처라는 근처는 샅샅이 뒤져본 참이야. 니가 말하는 근처가 ‘서울’은 아니겠지? 어디서 썰을 푸는거야? 뻔뻔하게 거짓을 고하고 있는 박태준을 바라보자니 머리가 다시금 어지러워 진다. 게다가 왠일인지 연신 내 눈치를 살피는 박태준의 행동이 심히 거슬린다.



복잡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나 스스로에게 ‘침착하라’는 자기 최면을 몇 번이고 걸고 또 걸었다. 그리고 어색한 침묵과 함께, 꽤나 오랜시간을 탕안에서 앉아 있다가 우리는 일제히 온천을 빠져나왔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리하는 동안에도 박태준이 연신 나의 눈치를 살피는게 거슬렸다. 지도 사람인데 캥기는게 있겠지. 그리고 나는 최소한 니가 무엇에 그리 캥겨 하는지도 잘 알고 있어.





옷을 다 갈아입고 네명이 나란히 온천을 나서는데, 어둑해진 밤을 뚫고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와 최길수였다. 강병길이 그런 아내를 보고 반가운듯 인사를 건내려 하자, 박태준이 그를 막아세우며 다시금 내 눈치를 간헐적으로 살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터벅터벅 은혜에게 다가갔다.



“박사장님 호텔에서 계속 있었던 거야?”

-어.

“실내온천..?”

-어.



기분나쁠 정도로 단답형으로 대꾸하는 은혜를 바라보며, 다시금 화가 치솟았지만 나 역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가까이서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니 어쩐지 조금 ‘피곤해’ 보이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무엇인가를 더 말하려다 아내의 눈치를 한번 살핀 나는 이내 그것을 그만두기로 하고 박태준을 바라봤다.



“지훈씨랑 은혜씨는 내일 올라가신다고 하셨죠? 서운하네요.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와이프 보지구녕이랑 가까워 졌겠지. 이 개자식아. 대꾸도 없이 그저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태준의 말을 듣고 있자니, 돌연 뒤에 서 있던 아내가 그만 돌아가자는 말을 내게 건낸다. 나도 여기에 더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 가볍게 인사를 건내고는 아내와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박태준이 무언가를 말하려는것도 같았는데, 나는 그냥 애써 무시하기로 마음먹었다.







9. 들어서는 안될 이야기





“박사장님 호텔방은 지낼만했어?”

-아씨, 아까부터 왜 자꾸 같은 말을 물어봐?

“아니.. 아니. 그냥 궁금하잖아..”

-뭐가 궁금한건데?

“아니, 왜 화를 내? 난 그냥 걱정이 돼서”

-무슨 걱정? 오빠 무슨 열등감 같은거 있어?

“뭐... 뭐?



펜션까지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모처럼 용기를 내어 아내에게 말을 걸었건만, 돌아온 반응이 최악이다. 어이가 없어 그런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분위기가 금새 험악해져 버렸다. 나도 참 한심한게, 어느순간부터 박태준을 제 3자에게 소개할때의 호칭이 ‘박사장’으로 굳어있었다. 그리고 더 한심한건, 아내의 입에서 ‘열등감’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을때야 비로소 내가 습관처럼 박태준을 박사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이었다. 길거리에서 싸움이라도 날 것 같아, 일단 펜션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려는 찰나에 아내가 대꾸도 없이 휙 돌아서서는 펜션을 향해 걸어가 버렸다. 화도 화지만, 은혜의 그런 태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도 답답해서 그저 묵묵히 펜션까지 아내를 따라 걸었다.



펜션방에 들어온 은혜는 방의 불을 켜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위에 누워버렸다. 그저 묵묵히 그런 아내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듯 지켜보고 있자니, 침대에 누웠던 아내가 무슨생각에서인지 ‘아이씨’를 외치며 바지춤에서 무언가를 꺼내 몇번이고 만지작 거리더니, 신경질적으로 그것을 어딘가로 팽개치고는 다시 침대에 누워버린다. 하고 싶은 말이 수만가지였던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다가 그래도 '꼭 한가지' 만큼은 확인하고 싶은게 있어 조심스럽게 아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혹시... 혹시 아까 호텔에 있을때, 박태준이 거기 갔었어?”

-........



벌써 잠들었을리는 만무하고, 내가 일부러 박사장이 아닌 ‘박태준’이라는 이름 세글자를 조심스럽게 아내의 귓가에 내던지자, 기분탓인지 아내의 몸이 잠깐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금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정신이야? 그 사람이 거길 왜 와? 계속 오빠랑 같이 있었던 거 아니었어? 아까부터 왜 그러는건데? 아 몰라, 귀찮아. 피곤하고. 시끄러우니까 옆에서 자려면 자고, 말려면 마”

-아니... 그게...



이쯤되니 더 이상 아내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봐야 좋을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하려던 말을 거두고 침대앞 방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빌어먹을. 결국 내 두 눈으로 확인한건 아무것도 없는건가. 그냥 이렇게 찜찜한 기분만 가득한채 내일 집으로 돌아가는건가. 병신. 제길. 한참을 아내의 곁에서 고개를 떨구고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하는 수 없이 내일 집에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천천히 짐이 있는 방문을 열었다.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려 옷가지며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을 주섬주섬 챙기는데, 자동차 키홀더가 보이질 않는다. 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짐정리를 거의 끝낼때까지 자동차 열쇠를 찾지 못하자 머리가 슬슬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까 아내가 신경질적으로 침대옆 어딘가에 던져버린게 혹시나 자동차키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방에서 나와 천천히 아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내의 곁에 다가가자 이미 잠들어있는지 미동조차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아까 은혜가 무언가를 던진쪽을 향해 휴대폰 후레쉬를 꺼내들어 살펴보니, 바닥에 왠 물건이 떨어져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자동차 열쇤가 싶어 다가가 그것을 바라보니, 자동차 열쇠가 아닐뿐더러 왠지 조금 낯선 '카드키'였다. 이게 뭔가 싶어서 조심스럽게 후레쉬를 비추어 살펴보니, 카드에 인쇄된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xx호텔’



아.. 아마도 박태준의 방키인것 같다. 은혜가 박태준에게 열쇠를 돌려준다는 것이 경황이 없어 그대로 들고 온 것이리라.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박태준의 방키를 어딘가에 내려놓으려다가 문득 머릿속으로 어제 새벽의 일들이 떠올라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아 맞다. 자동차 열쇠라면 아마도...’



틀림없다. 어제 새벽에 박태준의 방에 잠깐 들어갔다가 방의 넓은 규모에 넋이 팔려서는 박태준의 침대 옆 후미진 곳에 내 자동차 열쇠를 내려놓았던게 그제서야 기억이 난다. 아 제길. 차라리 기억이 나질 말것이지, 왜 그것만 그렇게 또렷하게 기억이 나냔 말이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



강병길이나 박태준에게 전화라도 걸어볼까 하다가 이내 그것을 그만두기로 하고,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잠들어 있는 아내를 스윽 한번 확인하고는 박태준의 방열쇠를 바지춤에 꽂아넣고 펜션문을 나섰다.



15분 정도를 천천히 걸어 호텔앞에 도착한 나는, 쉼호흡을 한번 하고 호텔 문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는내내 박태준일행에게 전화를 걸까도 생각해 봤지만, 박태준의 방에서 나의 자동차 열쇠를 찾기 이전에, 개인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몇가지 있었기 때문에 그만두기로 했다.



떨리는 가슴으로 로비를 통과하자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제와는 다른 직원 하나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괜시리 의심받아 좋을게 없다는 생각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바지춤에서 박태준의 방키를 꺼내들어 보였다. 그러자 직원은 조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제길.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애써 무시한채, 마침 입을 열고 있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쏘옥 몸을 들이 밀었다.



박태준의 방 앞에 잠시간 서 있던 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노크소리를 몇 번 하고 난후에야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방에 카드를 꽂아 넣었다. 그러자 방문의 잠금표시가 풀리더니 문이 스르륵하고 열린다. 나는 황급히 박태준의 호텔방 안으로 몸을 집어넣고선 재빨리 문을 닫아잠궜다.



박태준의 방으로 들어서는데 연신 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바보같이 아무것도 한게 없는데 이렇게까지 떨리다니. 역시 도둑질도 해본놈이 잘한다고 했던가? 그 말이 하나 틀린게 없다.



나는 서둘러 아마도 내 자동차 키가 놓여져있을 박태준의 방으로 슬금슬금 문을 열고 들어갔다. 휴대폰 후레쉬를 켜고 여기저기를 비추니 생각보다 쉽게 나의 자동차 열쇠를 찾을 수 있었다. 식은땀을 걷어내며 아내가 반나절가량 누워있었을 ‘실내온천’이 있는 방으로 자리를 옮기려는데, 불현듯 박태준의 호텔방문의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랄대로 놀란 나는 발을 동동 구르다, 내 자동차키가 있었던 방문으로 서둘러 다시 들어가 침대밑으로 황급히 기어 들어갔다. 숨을 죽이고 몸을 덜덜 떨며 앞이빨로 입술을 살포시 깨물고 있는데, 얼마 가지 않아 방에 불이 환히 켜지는게 보였다. 마음속으로 하나님, 하나님을 외쳐대던 나는 그저 무사하게 박태준의 호텔방에서 빠져나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바람과는 다르게 침대위로 누군가가 쓰러지는 묵직한 중량감이 등뒤로 전해져 왔다. 침을 꼴깍 삼키며 그저 묵묵히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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