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 게시판] 미소짓는 아내 - 에필로그 - 딸타임

미소짓는 아내 - 에필로그

화창하게 내려쬐는 햇살이 눈부신 오후.

도심지에 보는 이가 지겨울 정도로 많이 늘어선 커피 전문점에는 오늘도 사람이 북적이고 있다. 커피 전문점은 만남의 장소로도 유용하기에 사람 만나는 일이 잦은 사람들 사이에선 길 찾기가 쉽고, 상대방과 바로 대화 나누기에도 좋은 장소이다.



“……쪽쪽.”



은은한 커피 향이 가득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이 커피 전문점은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고, 삼삼오오 둘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도 있는 가하면 명백히 사람을 기다리는 눈치의 사람들도 있다. 그 사람들 속에서 커피를 즐기는 것이 아닌 마치 피로한 몸에 당분을 억지로 밀어 넣어주듯 마시는 피곤한 분위기를 가진 남자가 앉아있다.

입구 쪽을 살피는 기색이 명백한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자신이 세운 계획을 실행에 옮기느라 정신이 없는 안정수이다.

그 날 이후로도 상당히 바쁘고,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나름 숨기려고 옷도 신경 쓰고, 외모에도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게끔 한 듯싶지만 그럼에도 그를 둘러싼 분위기는 상당히 피폐해 보인다.

북적이는 커피 전문점 안을 둘러보는 그의 눈에선 별 다른 감흥이 없어 보인다. 마치 눈앞에 드리워진 문제를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모습이다. 사람들의 대화소리, 행복한 웃음소리 속에 파묻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커피 전문점 입구를 바라보던 안정수의 눈에 만나려는 사람을 발견했는지, 잠시 이체가 감돈다.



“아, 여기입니다.”



입구에 선 채 이리저리 카페 안을 둘러보던 여성을 향해 안정수는 소리 높여 그녀를 부른다. 안정수의 목소리를 들은 여성은 별다른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표정으로 다가온다. 안정수 역시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성을 재빨리 눈으로 살펴본다.



‘……힘들겠군.’



안정수는 자신의 계획에 필요한 여성을 찾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눈앞의 여성은 무리처럼 보인다. 그녀의 모습 중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우아한 걸음걸이와 정숙하면서도 고급스런 분위기의 옷차림이었다. 주기적으로 관리 받는 것 같은 단정한 헤어스타일이나 부드러운 인상. 사람을 대함에 있어 호감을 주는 여유 있는 미소는 현재 그녀는 아무런 부족함도 없다는 걸 절로 알 수 있게 해준다.



“안녕하세요. 그쪽이 말씀하신…….”

“아, 예. 안녕하신가요? 안정수라 합니다.”



안정수는 간단하게 인사를 하며 맞은편에 앉는 그녀의 외모를 더욱 뜯어봤다. 윤기가 도는 머릿결, 향기로운 여성용 화장품의 냄새, 작지만 여유 있는 미소가 걸린 입술, 어두운 톤의 고급스러워 보이는 일체형 원피스는 그녀의 정숙한 이미지를 더욱 끌어올려 준다. 그럼에도 완곡하게 드러난 가슴 라인이나 의자에 앉을 때 살짝 엿보인 부드러울 것 같은 엉덩이 라인은 과연 김우영의 입맛을 자극하는 여인임에 틀림없다.



‘그와 엮었던 적이 있는 여성이지만 이 사람도 틀렸군…….’



안정수가 찾고 있는 여인의 절대조건 중 하나가 바로 과거에 김우영과 관계를 가졌던 여인이다. 그리고 믿기 힘들지만 눈앞에 있는 이 여성도 김우영과 자의든 타의든 관계를 가졌던 여성인 셈이다.

첫 번째 조건을 만족했지만 그녀의 분위기나 눈빛, 김우영을 향한 감정 등을 비록 이야기 나누지 않았어도 느낄 수 있다. 결코 김우영에 대해 적대적으로 끝난 것은 아니란 것을.



‘김우영 그도 어떤 의미론 정말 대단하군.’



안정수는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며, 눈앞에 있는 여성과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이 여인은 틀렸다고 결론 내렸기에 안정수는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김우영에 대한 생각만이 머릿속에서 감돌고 있다.

안정수가 그 날 이후로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그와 관계를 가졌던 여성을 찾아 다녔다. 그리고 의외로 그와 엮였던 여성을 찾는 건 쉬웠다.

너무 많았으니깐…….

하지만 더 의외인 건 지금까지 그와 엮였던 여성들은 의외로 그에게 크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여성이 없다는 점이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과정이 어떻든 지금에 이르러선 그와 엮인 걸 크게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하긴 안 그랬으면 이렇게 자신을 만나러 나올 리 없으려나?’



그와 엮였던 여성들의 소재를 알아낸 뒤 여성들을 만나기 위해, 그의 화제를 꺼내기도 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이용하기도 하고, 만남을 종용하는 등 갖은 노력이 뒷받침되긴 했지만 대부분의 여성이 이렇듯 자리에 나왔다.

당연하지만 처음에는 모든 여성들이 경계하고, 꺼려했지만 안정수 역시 폼으로 영업사원을 하는 건 아니다. 화려한 언변이나, 설득 등은 그도 상당한 수준이기에 이렇게 단순 만남까지 이끌어 내는 건 쉬웠다.



‘하지만 조건에 부합하는 여성을 찾기 힘들군.’



안정수는 눈앞의 정숙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여성과의 대화를 재빨리 마무리 짓고 다음 여성을 만나기 위해 이동했다.

차를 몰아 도착한 곳은 사람의 왕래가 많고, 만남에 있어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 좋은 만남의 광장처럼 쓰이는 오픈 형태의 카페였다. 안정수가 사람을 만남에 있어 굳이 이런 장소를 택하는 이유는 역시나 경계심을 누그러트리기 위함이다.



‘이번에 만나는 여성은 꽤나 만남까지 이끌어 내는 데 힘들었지.’



안정수는 간단하게 요기를 채울 음식을 주문하고 상념에 잠긴다. 지금 만날 여성은 경계심이 상당했다. 그리고 그 경계심이 높은 것 때문에 안정수는 더욱 물고 늘어졌다. 경계심이 높을수록 그가 원하는 여성일 확률이 높기에.



“주문하신 음식입니다.”



때마침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 준 종업원에게 작게 감사를 표하고 요기를 채울 음식을 입안에 밀어 넣는다. 그렇다. 밀어 넣는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 날 이후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에 있어 스스로도 힘겨웠기 때문이다.



“…….”



안정수는 입안의 음식을 살기 위해 먹는 것처럼 의무적으로 섭취하며 아내를 떠올린다. 그 날 이후 아내와의 관계는 아슬아슬하기 그지없다. 둘 사이에 커다란 벽이 생긴 것처럼 묘한 거리감도 느껴진다. 아니, 그런 거리감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빨리 그를 떼어내야 하는데.’



안정수는 아내와 자신 사이에 흐르는 숨 막히고, 어색한 분위기보단 아내의 상태가 신경 쓰인다.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아내가 해야 할 일을 마치 의무적으로 행하고 있다. 자신을 향한 사랑이 식은 것처럼 냉정하고 무덤덤하게 자신을 대한다.



‘하여간 사회생활이 익숙해지며 어른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는 게 더 능숙해졌단 말이야.’



두꺼운 가면을 뒤집어쓰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한층 익숙해진 아내. 그 날 이후로 그녀는 더욱 가면을 뒤집어쓰는 것에 더욱 필사적으로 변했다. 마치 무너지기 직전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보호본능처럼 가면을 뒤집어 쓴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가면을 쓰고 자신을 대하는 게 오히려 감정을 더 알기 쉽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그런 걸 생각하지 못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는 뜻일까…….

자신이 아무리 덜렁거리고 어리숙하다 해도 그렇게까지 얼굴에서, 몸짓에서, 분위기에서 위태위태한 분위기가 흘러나오면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자신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몰려있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아내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 깨지고 결국 본능에 몸을 맡겨 버린 것일까?

모를 일이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전부 틀렸을 수도 있고, 둘 다 맞을 수도 있다. 자신의 감정도 잘 모르는 게 사람인데 타인에 대한 생각과 마음이란 건 더욱 모를 일이다.



“……이야기를 나누면 될 일인데 말이지.”



안정수는 음식을 의무적으로 먹으면서도 자괴감에 빠진다. 서로 소통이 부족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아니, 이 지경에 이르렀기에 더욱 이야기를 나누는 게 힘든 걸지도 모르겠다. 문득 안정수는 피식하고 자조 섞인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도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지만.”



안정수는 계획을 실행함에 있어서 많은 걸 조사했고, 아내와 김우영 사이에 있었던 일도 어느 정도 알아냈다. 그렇기에 화가 났고, 그렇기에 미안했다. 수많은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놓아주지 않던 도중 안정수의 우물거리던 입이 갑작스럽게 멈추며 더불어 다른 움직임도 함께 멈춘다.



‘…….’



아내에 대한 걱정에서 이어진 상념. 그러자 지금 아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란 생각에 이르자 안정수의 가슴은 크게 뛴다. 이제는 가슴 속 깊이 뿌리내렸던 배덕감이라는 감정은 그 날 활짝 만개한 이후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마음껏 뽐내곤 하얗게 불타 사라졌다.

하지만 꽃이 시들 때에는 반드시 씨앗을 남긴다.

그리고 그 씨앗은 아직도 자신의 가슴 속에 남아 이렇게 때때로 싹을 틔우려고 발악하는 걸 종종 느낀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지.”



배덕감이라는 감정에 몸을 맡겨 행동한 결과가 이 꼴이다. 이 상황에서도 아내를 향한 사랑이 식지 않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도 무섭다. 가슴속에 소용돌이치는 이 감정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맞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 무의미한 고민 끝에 얻은 건 단 하나다. 자신이 배덕감이라는 감정이 가슴 속 깊이 자리 잡은 것처럼 그녀 역시 가슴 속 깊이 자신을 향한 사랑 외에 어떠한 감정이 싹텄을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그렇게 차가우면서도 위태로워 보이는 분위기를 가지고 자신을 대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 그녀의 가슴속에서 끊임없이 부딪히고 싸우고 있기에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이미 결론이 났다면 그렇게 힘겨워 할 리 없다.

그러길 바라는 것은 자신의 이기심일까?

나오지 않는 답을 찾아 헤매듯 끊이지 않는 상념 속에 어느 새 약속 시간이 다됐다. 때마침 멀리서 걸어오는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잘하면 될 지도.”



메마른 안정수의 눈에 이채가 감돈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여성을 찾은 걸지도 모른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웨이브를 넣은 푸석푸석한 머리에 거칠지만 과거 뽀얗고 윤기 있었을 것 같은 피부, 전체적으로 작은 키지만 헐렁하고 전혀 신경 쓰지 않은 평범한 옷차림 위로도 알 수 있는 탐스런 과실 같은 몸매. 동시에 피로해 보이고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위태로운 분위기를 두른 그녀를 본 순간 안정수는 확신했다.

지금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그녀는 과거에 상당히 귀엽고, 애교 넘치는 여성이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의 그녀의 모습은 분명 김우영과 엮이며 많은 게 바뀐 게 확실한 여성이라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성이라고!



‘그렇다면…….’



안정수는 다가온 여성과 인사를 나누며 눈을 빛냈다. 자신의 계획에 필요한 여성임에 틀림없기에…….

고요하고 부드러운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길거리. 회식을 끝내고 각자의 집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고, 2차를 외치며 화려한 길거리로 사라지는 이들도 있을 아직은 이른 시간. 길거리에 늘어선 수많은 모텔 중 한 곳에는 이른 시각부터 이미 손님을 받은 방이 있다.



“색-색-.”



어두운 방 안에 떠도는 여인의 고른 숨소리. 그리고 그 여인의 숨소리가 흘러나오는 침대에선 부스럭 소리가 나며 한 사람이 몸을 일으킨다.



“…….”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사람이 곁에 잠든 여인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자 고른 숨소리를 내던 여인은 그 온기에서 안심을 얻은 듯 살짝 미소가 떠오른다. 사랑스런 미소가 떠오른 그 여인은 다름 아닌 안정수가 낮에 만났던 위태로운 분위기의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쓰다듬던 사람은 놀랍게도 안정수였다.

침대에 잠든 여인은 그 동안 부족했던 사랑을 채운 것처럼 갈구하던 온기를 받은 것처럼 편안해 보인다. 어딘가 피로하고 위태로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부드러운 얼굴로 잠든 여인을 내려다보던 안정수는 조심스레 침대에서 빠져나온다.

침대에서 빠져나온 안정수의 모습은 놀랍게도 알몸이었다. 동시에 그가 빠져나오면 흘러내린 침대 시트는 침대 위에 편안히 잠들어 있는 여인의 적나라한 모습을 들춰냈다. 그녀 역시도 알몸으로 잠들어 있던 것이다. 어렴풋이 방 안에 떠도는 야릇한 체취와 어쩐지 은은하게 남아있는 온기는 둘이 나눈 뜨거운 사랑을 짐작케 해준다.



“…….”



하지만 어쩐 일일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안정수는 방금 전까지 사랑하는 여인을 쓰다듬던 조심스런 손길과 온기를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차가운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다. 옷을 주섬주섬 입으며 돌아갈 준비를 하자 침대 위에 잠들어있던 여성이 몸을 일으킨다. 알몸인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운 듯 침대 시트를 탐스런 과실처럼 부푼 가슴까지 끌어올리며 조심스레 물어온다.



“가는 건가요?”

“예. 다음에 또 연락드릴게요.”



차가웠던 그의 표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한 미소가 걸려 있어, 불안해하는 여인을 안심시키듯 살짝 키스를 나누곤 먼저 방을 나선다. 떠나기 직전 온기를 갈구하는 처절하기까지 한 애절한 여인의 감정어린 눈동자가 그를 붙잡았지만 그는 외면한 채, 아니 모른 채 하며 걸음을 옮겼다.



“……후우~”



모텔을 먼저 빠져나온 안정수는 어딘가 힘겨운 표정으로 담배를 입에 물곤 불을 붙인다. 안정수의 모습은 어쩐지 위태로워 보인다. 마치 무너질 것 같은 자신을 다잡는 그런 정나은과 비슷한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이다.



“이로써 계획에 필요한 것은 전부 모았네.”



온기를 갈구하는 김우영에게 상처받은 여인. 김우영에게 받은 그런 사랑이 아닌 순수한 사랑을 원하는 그런 여인을 이용해야하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며 무너질 것 같은 자신에게 채찍질을 한다. 어쩐지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보고 싶네. 뭘 하고 있을까?’



안정수는 어두운 도시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보일 듯 안 보이는 희미한 별빛을 찾아 헤맨다. 끝없이 펼쳐진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는 희미하게 보이는 너무나도 먼 별빛을 이정표 삼아 터덜터덜 걸음을 다시금 옮겼다.



안정수가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훨씬 전. 정확히는 안정수가 계획에 필요한 여인을 만나며 메말랐던 마음에 다시금 불을 지피던 그 시각. 부드러운 황혼 빛이 은은하게 내려쬐는 저녁이라기엔 이른 오후 무렵.

두터운 커튼 너머로 은은한 황혼 빛이 스며드는 거실. 거실에 놓인 TV 옆에는 장식용 귀여운 토끼 인형이 놓여 있는 절제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그곳은 안정수와 정나은의 보금자리다.

TV 옆에 놓인 토끼 인형의 눈에는 거실의 전경과 열려있는 안방 문을 통해 보이는 단편적인 모습, 거실과 이어진 부엌에선 정나은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 또한 토끼 인형의 눈에 비춰지고 있다.

달그락, 달그락.

음식을 만드는 식기의 소리와 열기가 은은하게 부엌을 통해 집안에 퍼진다. 오늘은 쉬는 날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퇴근이 빨랐던 것일까? 아직 저녁이라기엔 이른 오후임에도 정나은은 이미 편안한 평상복을 입고 저녁 준비에 한창이다.

틀어 올렸던 머리는 편하게 풀었고, 콧잔등 위에 걸쳐진 반무테 안경의 헐렁하게 흘러내린 모습은 평소 똑 소리 나는 그녀에게서 보기 힘든 멍한 분위기가 엿보여진다.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싸늘한 집안. 그런 싸늘함을 이기기 위해 그녀는 부드러운 크림색의 스웨터와 빛바래고 헐렁해져 입기 편안한 청바지를 입고 있다.



“…….”



싸늘한 집안 공기와 그녀의 딱딱한 무표정, 저녁상을 차리기 위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어쩐지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나, 둘 저녁상에 오를 음식이 만들어져 감에 따라 때때로 이 음식을 먹어줄 이를 떠올리는 지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지만 곧이어 그래선 안 된다는 듯이 차가운 무표정으로 돌아간다. 마치 자기 자신을 향해 자책하듯, 벌을 주듯 말이다.

얼마나 그렇게 부엌에 서서 기계적으로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을까? 정나은은 시계를 엿보곤 따뜻할 때 먹으면 맛있을 계란말이를 가장 마지막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그렇게 계란말이의 조리가 끝나갈 무렵 갑작스레 경쾌한 차임벨이 집안에 울려 퍼진다.



“……?”



정나은은 차갑던 무표정에서 살짝 의문이 떠오르며 조리하던 계란말이를 재빨리 마무리 짓고 불을 황급히 조절한 뒤 현관문으로 나선다. 곧이어 철컥하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으로 나간 정나은의 뒷모습에선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토끼 인형은 마치 예상치 못한 손님이 온 것처럼 움찔거리는 정나은이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떤 손님이 왔을지 궁금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은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다. 하지만 그런 토끼 인형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듯 곧이어 방문한 손님이 현관문을 통해 들어선다. 근래 들어 자주 들락날락 거리는 능글맞은 미소가 특징인 중년 남성이다. 토끼 인형은 순해 보이는 인상의 남성과 함께 그녀가 가게에 찾아와 진열되어 있던 수많은 인형 중 자신을 선택해 주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와 함께 가게를 방문해 자신을 데려왔던 순해 보이는 남자 외에 다른 남자가 이렇게 자주 들락거리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



현관문에서 부엌으로 향하는 정나은의 모습에선 아무런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는다. 마치 자신의 가슴속에 소용돌이치는 두 개의 상반된 감정을 드러내기 싫은 것처럼, 인정하기 싫은 것처럼 가면을 뒤집어 써보지만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비틀린 미소는 존재하지 않을 토끼 인형의 가슴을 뛰게 하는 기묘한 열기가 담겨 있다.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하며 때때로 떠오른 부드러운 미소와는 전혀 상반된 미소.

토끼 인형은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두 개의 미소가 똑같은 여인의 것이라곤 믿어지지 않는다. 그런 토끼 인형의 의문에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은 채 제집인양 성큼성큼 들어서는 능글맞은 중년과 방문한 손님을 내버려둔 채 부엌으로 가 조절했던 가스 불을 완전히 끄는 정나은의 모습을 감기지 않는 인형의 눈으로 바라본다.

저녁 준비가 한창이던 정나은은 한동안은 가스 불을 쓸 일이 없다고 말하듯 가스 밸브까지 착실히 잠그는 모습에 토끼 인형은 의아해한다. 하지만 토끼 인형의 의문점의 해답은 고민에 이르기 전에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거리낌 없이 거실을 활보하던 중년 남성이 외투와 가방을 소파에 휙 던지곤 정나은이 있는 부엌으로 다가간다.

중년 남성은 가스 밸브를 잠근 정나은을 뒤에서 껴안는다. 예상한 일인 듯 놀란 기색도 없이 받아들인 그녀의 반응에 중년 남성은 실소를 하며 부드러운 크림색 스웨터 위로 부풀어 오른 그녀의 가슴을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움켜쥔다. 크림색 스웨터 때문일까? 달콤한 마시멜로를 연상케 하는 속이 꽉 찬 그녀의 마시멜로는 중년 남성의 손을 통해 그 촉감이 고스란히 전해지는지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런 미소가 떠오른다.



“…….”



고개 숙인 채 덤덤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던 정나은의 귓가에 중년 남성은 무언가를 속삭인다. 대화 내용이 궁금한 토끼 인형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눈조차 감을 수 없는 토끼 인형은 그저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그녀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 자신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는 중년 남성 쪽으로 고개를 향한다. 머리카락에 가려졌던 그녀의 얼굴 표정이 토끼 인형의 눈에 보이는 가 싶었더니 금세 중년 남성의 얼굴이 그녀와 겹쳐진다.

남성이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라고 말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녀의 의지일까?

토끼 인형은 알 도리가 없지만 두 사람의 얼굴은 한동안 겹쳐진 채 질척한 소리를 자아낸다. 그 와중에도 중년 남성의 두 손은 끊임없이 그녀의 몸을 맛보듯이 더듬는다. 스웨터 위로 그녀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그의 손은 어느새 스웨터 안으로 들어가 꾸물꾸물 징그럽게 움직이는 것이 옷 위로 알 수 있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하반신을 더듬고 있었는데 헐렁해진 청바지여도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닌지 한동안 청바지 위로만 더듬던 그의 손길이 결국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 청바지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하읍!”



두터운 커튼 너머로 거실로 스며드는 오렌지 빛이 조금씩 사그라지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어스름한 그림자가 부엌에 더욱 짙어지며 드리운다. 어스름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부엌에선 농밀한 키스를 나누는 질척한 소리가 새어나온다. 곧이어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들러붙은 채 서로를 탐하던 두 남녀가 드디어 떨어진다.

그리곤 휙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부엌에 비치되어 있는 식탁 위에 정나은이 털썩 쓰러진다. 중년 남성이 그녀와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를 잡아당겨 식탁 위에 엎드리게 한 것이다.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놀랄 만도 하건만 그녀는 그저 식탁 위에 엎드린 채 부족한 숨을 몰아쉴 뿐이다. 중년 남성은 정나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씩 웃은 후 그녀의 청바지를 확 끌러 내린다. 중년 남성은 청바지를 완전히 벗겨버릴 생각이었나 보지만 탄력적인 엉덩이 바로 밑 건강미 넘치는 허벅지쯤에 청바지가 걸린 채 더 이상 내려가질 않는다. 빛바랠 정도로 오래입고 헐렁해졌다 해도 청바지의 버튼과 지퍼를 풀지 않고 완전히 벗겨버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중년 남성은 재미있다는 듯 입맛을 다시더니 그녀를 그대로 둔 채 자신의 바지를 완전히 벗어버린다.

중년 남성은 능글맞은 웃음소리를 내며 허벅지쯤에서 걸린 청바지 때문에 한층 업 된 그녀의 탄력적인 엉덩이를 손으로 한번 내려치자 찰진 소리가 집안을 울린다.



“읏?!”



움찔거리며 고통어린 신음을 내뱉는 정나은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단번에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허리를 밀어 넣는다. 갑작스레 힘을 받아 덜컥거리는 식탁의 소리와 둔탁한 타격음이 화음을 이룬다. 중년 남성이 그녀의 허리를 양 손으로 붙잡아 고정시킨 뒤 허리를 천천히 놀리기 시작하자 덜컥덜컥 흔들리는 식탁과 그에 따라 정나은이 작게 헐떡이는 소리가 은은하게 섞이기 시작한다.



“……하아, 하아, 하아.”



덜컥덜컥 흔들리는 식탁, 부엌에선 절대 나지 않을 생소한 찰진 소리, 조금씩 커져가는 여인의 헐떡이는 숨소리. 은은하게 부엌에서 퍼지기 시작한 집의 안주인의 헐떡임은 점점 열기를 띄기 시작한다. 중년 남성은 식탁에 엎어져 있는 그녀가 서서히 달아오르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더욱 거칠게 허리를 놀리기 시작한다.

방금 전 서로 얽힌 채 키스를 나누던 때와는 달리 여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그런 의지가 느껴진다. 마치 자신의 성욕을 채우는 도구를 대하는 그런 느낌이 중년 남성의 눈빛에서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걸 행동으로써 보여주겠다는 듯 거칠고, 빨라진 허리놀림 외에 허리를 붙잡곤 고정시키던 한 손을 식탁 위에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던 흑단 같은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쥐곤 잡아당겨 고개를 억지로 들게 한다.



“아읏! 하으, 하윽! 하악! 하악!”



중년 남성의 한층 거칠어진 허리놀림과 그의 손에 의해 강제로 들려진 고개 때문인지, 정나은의 입에선 순간 고통어린 소리가 새어나왔지만 고통어린 신음소리는 금세 한층 깊고 야릇한 헐떡임으로 바뀌며 그녀가 느끼고 있는 쾌락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모조리 토해내고 있다.

여자에게 부엌이란 어떤 의미론 자신만의 성역이다.

현대에 이르러선 그런 의미가 소용없어졌지만, 그럼에도 부엌이란 곳은 안주인의 싸움터이자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녀만의 장소이다. 조리기구의 배치도, 자주 쓰는 조미료의 위치도, 그릇의 취향이나 수납장소 등 모조리 그녀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이른바 여자의 작은 성인 셈이다.

남편도 들어오기 힘든 여자의 성역에 남편도 아닌 외간 남자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흙 묻은 발로 성큼성큼 들어와선 작은 성의 여왕을 자신의 배아래 깔아뭉개곤 능욕하고 있다. 부엌에서만큼은 그 어떤 존재보다 도도하고 강해야 할 여왕은 외간 남자 아래 깔려 부끄럽게도 야릇한 신음소리를 내지르며 몸에서 터져 나오는 쾌락을 절절할 정도로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식탁이란 여왕이 갈고닦은 무기를 이용해 음식이라는 공격을 가족이나 손님 등에게 선보이는 자리임에도 그 위에 굴욕적으로 엎어진 채 오히려 자신이 도구 취급 받으며 자신의 성을 쳐들어온 외간 남자에게 성욕이란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



토끼 인형은 이 집의 안주인이 부엌에서만큼은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여인이 너무나도 손쉽게 장악당한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정나은의 그런 처지를 누군가가 안타까워 해준 것일까? 아니면 두 사람의 일그러진 사랑의 형태를 응원하기 위함일까?

거실에 스며들어오던 오렌지 빛 황혼은 더욱 짧아지며 집안에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 어스름하던 부엌에도 한층 어두워지며 거실로 스며들던 햇빛은 기껏해야 꽉 낀 청바지 때문에 버둥거리는 것도 못하고 애처롭게 흔들리고 있는 그녀의 다리와 힘이 잔뜩 들어가 근육이 터질 듯 솟은 중년 남성의 다리만을 비춰준다.



“하악! 하으읏! 하응! 으으응?! 햐으으으으으응!”



부엌에 짙게 깔린 어둠 속에 숨은 두 사람. 덜컥덜컥 거리는 식탁의 소음이 빨라짐에 따라 정나은의 야릇하고도 귀여운 신음소리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절정을 맞이한다. 부드러운 황혼 빛에 비춰지고 있던 두 사람의 다리. 꽉 끼는 청바지에 구속된 그녀의 두 다리는 부들부들 떨며 힘이 잔뜩 들어간다. 여인이 절정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중년 남성의 다리는 아직도 힘이 들어간 채 허리를 계속해서 놀리자 정나은의 양 다리는 경련이라도 난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쾌락에 인해 버둥거린다.



“……아, 아아앗, 햐으응?!”



더 이상 신음이라고도 하기 힘든 원초적인 쾌락에 어쩔 줄 모르는 여인의 목소리가 어둠속을 울린다. 곧이어 중년 남성도 자신의 욕망의 종지부를 찍는 깊은 목소리를 토해내며 그의 다리도 움직임을 딱하고 멈춘다. 부들부들 쾌락에 떨리는 두 남녀의 다리는 아름다운 황혼 빛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퇴폐적인 느낌이다.

토끼 인형은 어두운 식탁 위에 몸을 포개듯 엎어진 두 남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그리움에 휩싸인다. 토끼 인형이 느끼고 있는 그리움이란 그녀가 내뱉는 달콤한 목소리와 숨김없는 모습 때문이다.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순한 인상의 남자와 그녀가 자신을 데려온 후에도 종종 안방에서 들리던 풋풋하고 행복어린 목소리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변했다. 분명 안방에서 새어나오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쾌락이 묻어났지만 오늘처럼 솔직한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하물며 최근에는 순한 인상의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목소리마저 안방에서 흘러나오지 않은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자신을 데려온 정나은이란 여인은 저렇게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여자가 아니었는데 어느새 저렇게 바뀌었던 것일까? 아니, 분명 처음에는 서툴렀지만 지금처럼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고, 자신의 감정에도 솔직했던 여자였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풋풋하고 모든 게 어른으로써 서툴렀던 그녀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있었다.

그래서일까?

토끼 인형은 부엌에서 요리를 하며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던 것과 저 중년 남성이 방문하고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일그러진 미소가 어째서 다시금 떠올랐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자신은 인형이다. 그저 지켜볼 뿐…….



“……하아, 하아.”



고요한 부엌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가 집안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갈 무렵, 그녀 위에 포개져 있던 중년 남성이 몸을 일으키며 그녀에게서 떨어진다. 그러자 황혼 빛에 비춰지고 있던 그녀의 다리가 자신의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한차례 움찔거린다. 중년 남성은 그녀의 청바지에 손을 가져간다. 청바지의 버튼과 지퍼를 여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툭 하곤 청바지가 완전히 벗겨져 버린다.

바닥에 떨어진 청바지 속에는 정나은의 새하얀 속옷도 함께 들어있었는데, 속옷 한가운데 부분은 질척거리고 밤꽃 향기가 올라오는 하얀 욕망의 덩어리와 야릇한 향기를 풍기는 투명한 액체와 함께 섞여 오렌지색 황혼 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후우. 냅다 달린 것도 오랜만이군.”



중년 남성의 만족스런 말과 함께 식탁 위에 엎어져 있는 그녀를 바닥으로 내려 꿇어앉게 한다. 절정으로 사지에 힘이 안 들어가는지 정나은의 몸이 흐느적거리는 것이 황혼 빛에 단편적으로 보일뿐 그녀의 상반신 이상은 여전히 어스름한 어둠 속이다.



“알고 있지?”



중년 남성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정나은에게 다가가자 힘없이 바닥에 늘어져 있던 정나은의 손이 그의 하반신 쪽으로 올라가며 힘없는 목소리로 고분고분 대답한다.



“……네. 알고 있어요.”



그녀의 얼굴 그림자가 남자의 하반신 그림자 쪽으로 다가가더니 무언가를 핥고, 빠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온다. 동시에 그녀의 흐느적거리는 손은 그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더니 어스름한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녀의 손은 상냥하게 그의 하반신을 감싸 안고 이리저리 부드러운 손길로 허벅지며 엉덩이 등을 매만져주고 있다.



“…….”



거실로 스며들고 있던 햇빛이 점점 짧아진다. 한동안 그렇게 들러붙어있던 두 사람은 곧이어 떨어지더니 흐느적거리는 정나은을 데리고 중년 남성은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문 닫는 시간도 아까웠는지 문도 닫지 않은 채 안방으로 들어간 두 사람. 곧이어 남은 옷이라도 벗는지 사락사락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가 벌어진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아아! 하아! 하아! 흐으응!”



또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한 그녀의 솔직하고 달콤한 신음소리를 토끼 인형은 들으며 그들이 머문 자리를 바라본다. 부엌에 떨어져 있는 중년 남자의 바지와 하얀 속옷이 들어있는 그녀의 청바지.

하얀 속옷을 적시고 있는 두 사람이 토해낸 욕망의 덩어리는 한데 섞여 야릇하고도 퇴폐적인 향기는 은은하게 부엌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잠시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곳에도 그녀의 새하얀 속옷을 적시고 있던 욕망의 덩어리와 똑같은 액체가 마치 함락당한 성의 잔해처럼 바닥에 남아있다. 점점 짧아지는 아름다운 황혼 빛. 두 사람이 머물렀던 자리는 그 아름다운 황혼 빛과는 달리 탁한 빛이 빛나고 있었다.

토끼 인형은 집안에 울려 퍼지는 둔탁하고 찰진 소리와 절절히 쾌락이 묻어나는 솔직한 정나은의 신음소리를 그저 묵묵히 들으며, 열린 안방 문틈 사이로 단편적으로 보이는 흔들리는 침대시트를 거실에 스며드는 황혼 빛이 완전히 사그라질 때까지 묵묵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두터운 커튼 너머로 스며들던 황혼 빛도 완전히 사그라지고 거실에 깔렸던 어스름하던 어두운 분위기는 완전히 새까만 어둠으로 바뀔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안방에서 흘러나오던 둔탁한 살의 향연과 정나은의 달콤한 목소리도 곧이어 절정에 오른다. 해가 떨어짐에 따라 분명 집안의 공기도 더욱 차가워져야 정상이건만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뜨겁고, 야릇한 공기는 안방을 꽉 채우고도 거실 밖으로 흘러나와 온 집안을 조금씩 따뜻하고, 미묘한 공기로 바꾸고 있다.



“후우~.”



만족스럽고 열기가 느껴지는 남성의 깊은 한숨소리가 들리더니 안방에서 알몸의 중년 남성이 어두운 거실로 나온다. 두터운 커튼 너머로 새어 들어오는 인공적인 불빛이 중년 남성의 알몸을 어렴풋하게 비춰주자 그걸 본 토끼 인형은 눈살을 찌푸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 미약한 인공적인 불빛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온 몸이 땀과 타액으로 번들거리고 있어 그의 몸이 내뿜는 열기가 눈에 보이는 착각이 들 정도다. 중년 남성은 자신의 몸에서 떨어지는 땀과 타액을 전혀 개의치 않고 부엌으로 걸어가 냉장고 문을 벌컥 열곤 제집인양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중년 남성은 갈증을 해소해 만족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마신 물을 싱크대에 올려두려고 걸음을 옮기는데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중간에 걸음이 멈춘다.



“오호? 마침 출출했는데 잘됐군.”



중년 남성은 즐거운 목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집어 든다. 그의 손에 잡힌 건 한 눈에 봐도 부드러울 것 같은 샛노란 색의 계란말이였다. 토끼 인형은 그 모습을 보자 화들짝 놀란다. 그 계란말이는 분명 중년 남성을 위해 만든 게 아니다.

이 집에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을 데려와준 그 남자의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계란말이를 만들며 이걸 먹어줄 이를 떠올렸을 때 지었던 부드러운 미소가 토끼 인형의 머릿속에 떠오르자 더욱 초조해진다. 자신이 중년 남성을 막을 수는 없기에 현재 이 집에서 그의 행동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정나은이 있을 안방에 시선을 돌린다.

아까와는 달리 중년 남성이 안방에서 나오며 안방 문을 활짝 열어둔 채라 안방의 전경이 제한적이긴 해도 아까보다 훨씬 자세히 보인다. 열린 문을 통해 토끼 인형은 금세 그녀를 발견했다.



‘…….’



단편적으로만 보이는 침대 위에 나른하게 풀린 그녀의 한쪽 다리. 중년 남성과 같이 보이는 그녀의 다리도 땀인지, 타액인지 모를 투명한 액체로 번들거리고 있었고 힘없이 침대 위에 늘어져 있는 모습에서 토끼 인형은 그녀가 지금 중년 남성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고 깨달았다.

토끼 인형은 안타까워하며 부엌으로 시선을 돌리자 중년 남성은 그런 토끼 인형의 마음도 몰라주고 금세 그녀가 만든 계란말이를 냉큼 집어먹었다. 계란말이 속에 담긴 그녀의 사랑도, 정성도 원하는 이에게 닿지 못하고 중년 남성의 뱃속으로 전부 사라져 버렸다. 계란말이를 다 먹은 중년 남성은 거실 벽에 놓인 시계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알 게 뭐냐는 표정을 짓곤 다시금 성큼성큼 안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문 닫는 것도 귀찮은지 대충 휙 내두른 팔에 안방 문이 닫히려다가 제대로 닫히지 않고 살짝 틈이 벌어진다. 토끼 인형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안방에서 어두운 거실로 눈길을 돌린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그의 몸에서 떨어진 액체가 뚝뚝 떨어져 있었고, 어쩐지 투명하기만 해야 할 액체들 중에는 어둡기에 더욱 눈에 띄는 탁하면서도 새하얀 색의 액체도 극소량 떨어져 있었다.

더럽혀진 거실을 내려다보고 있던 토끼 인형의 귀에 철컥하는 차가운 쇳소리가 들린다. 이 쇳소리는 현관문이 열릴 때 나는 소리임을 알고 토끼 인형의 시선은 현관문을 향한다. 그리고 현관문을 통해 들어온 너무나도 익숙한 한 남자의 얼굴에 반가움을 느끼며 움직이지 않는 손을 흔들어 반겨준다.



“……?”



정나은과 함께 이 집에서 살고 있으며, 자신의 또 다른 주인의 남자의 이름은 안정수이다. 귀가한 안정수는 신발을 벗으려다 현관문에 놓인 신발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토끼 인형은 그가 저렇게 현관문에 선 채 신발을 바라보고 있자 그 의문에 대답해주듯 마음속으로 말을 건다.

‘손님이 와 있어요.’라고…….

안정수는 현관문에 놓인 신발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선다. 마치 소리 나는 걸, 자신의 기척이 들리는 걸 극도로 조심하는 그의 기이한 행동에 토끼 인형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싶어진다.

안정수는 가장 먼저 작은 방을 확인하곤 긴장감이 묻어나는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거실에 들어선다. 거실에 들어선 안정수는 문득 무언가를 밟은 것인지, 발쪽에 위화감을 느껴 아래를 내려다보자 거실 바닥이 정체모를 액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



무언가 공기도 끈적하면서도 후끈한 것을 눈치 챈 것인지 안정수는 마른침을 삼키곤 바닥에 떨어진 액체를 따라 안방과 부엌을 번갈아 바라본다. 무의식일까? 아니면 의도적인 것일까? 안정수의 발걸음은 안방을 피하듯 부엌으로 향하려는데 안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듯 들려온다.

부엌으로 향하려던 안정수의 발걸음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조심스럽게 안방을 향해 다가선다. 안방 문 앞에 선 그는 문고리에 조심스레 손을 뻗는데 그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움찔하며 문고리로 뻗던 손을 거둔다. 안방 문이 살짝 벌어져 틈이 있는 걸 깨달은 안정수는 잠시 그 자리에 선 채 망설이는 모습이다.

마치 마음을 다 잡을 시간을 가지는 것처럼 뜸을 들이는 안정수의 뒷모습을 토끼 인형은 그의 선택을 확인하려는 듯 눈을 떼지 않고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폭풍 전의 고요처럼 기분 나쁜 정적과 짙은 어둠이 깔린 거실에 점점 가빠져가는 안정수의 숨소리가 차갑게 식어가던 거실 공기에 두 사람이 만들어낸 열락과는 다른 여러 감정이 섞인 열기를 더해가며 그는 조심스레 벌어진 문틈 사이로 안방을 엿보기 시작했다.



김우영은 기분 좋은 피로감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섰다. 침대 위에 쓰러져 뜨거운 몸을 달래느라 헐떡이고 있는 알몸의 유부녀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능글맞은 미소가 입에 걸린다. 김우영은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아직은 낯선 남의 집 안방에서 빠져나와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벌써 해가 저물었군.’



분명 이 집에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아직 노을이 지고 있을 시간이었건만 오랜만에 회포를 푸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정나은이라는 절벽 위의 꽃을 꺾은 뒤 한동안 연락도 하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자신은 그동안 밀린 업무를 해결하느라 바빴고, 정나은에겐 마음의 정리를 할 시간을 줬다.



‘이미 잡은 물고기니깐.’



이미 잡아 언제든 요리 해먹을 수 있는 물고기인 만큼 천천히 음미하는 것만 남았다. 그렇게 서로 다른 시간을 지낸 뒤 갑작스럽게 오늘 이렇게 그녀의 집으로 방문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이 갑작스레 방문하자 그녀는 움찔하며 놀란 모습이었지만 결국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져 자신을 받아들인 것인지 순순히 집안에 들여보내줬다.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운 그녀의 자태에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갈증을 느껴 자리에서 껍질을 벗겨 달콤한 과실을 마음껏 맛봤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해결되지 않는 바닷물처럼 오히려 심해진 갈증에 그대로 그녀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서 한차례 더 관계를 나눴다. 쉬지 않고 연달아 두 차례를 격정적으로 관계를 나눴으니 정말로 목이 탈만도 하다.



“꿀꺽, 꿀꺽…….”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땀만큼 다시 물을 보충한 그의 눈에는 샛노란 계란말이가 보였다. 성욕을 해결하고, 갈증을 해결한 후이기에 먹음직스런 계란말이를 보자 식욕이 솟구쳐 김우영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입으로 쏙쏙 집어넣었다.



‘만든 지 얼마 안 됐나보네. 맛있는데?’



제대로 맛도 느끼지 않고, 그저 식욕을 해결하기 위해 그녀가 정성스레 준비한 계란말이를 전부 먹어치운 김우영은 거실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됐는데 어쩔까…….’



본래 그는 잠시 들러 그녀와의 회포를 푼 후 재빨리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맛본 달콤한 유부녀의 과즙은 그의 이성을 간단히 날려버렸고, 식욕마저 해결하자 다시금 성욕이 끓어오르는 걸 느끼고 있다.



‘……에라 모르겠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 날 이후 그가 잠잠한 것이 영 신경에 거슬리지만 현재 김우영은 눈앞에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 들어서며 손을 대충 휘둘러 문을 닫은 그는 침대 위에 쓰러져 있는 그녀 머리맡에 털썩 앉는다.



“…….”



침대 위에서 고른 숨을 내쉬고 있는 정나은의 모습을 조용히 내려다본다. 오랜만에 관계를 가진 탓일까? 아니면 그 날 이후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 탓일까? 관계를 가진 횟수는 평소보다 적은데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에서 흘러나오는 만족스럽고 지친 분위기는 한층 깊어 보인다. 침대 시트 위에 관능적으로 흐트러져있는 정나은의 검은 머리칼을 매만지자 그녀가 고개를 든다. 반쯤 감긴 몽롱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실소가 나온다.



‘큰일 났네……한동안은 웬만한 여자는 눈에 차지도 않겠어.’



일 관련으로도 여자를 상대할 일이 많은 그로써는 너무 높아져버린 눈 때문에 한동안 다른 여자는 눈에도 안 들어올 것 같다. 그녀의 머리칼을 상냥하게 매만지자 그녀도 나쁜 기분은 아닌지 조심스레 자신의 손에 기대는 느낌이다.



‘확실히 많이 솔직해졌군.’



역시 자존심 강한 여자들은 이렇게 제대로 꺾이고 나면 순종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 같은 경우 자포자기한 느낌이 강하지만…….



“……읏!”



정나은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김우영이 갑작스레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자신의 가랑이 쪽으로 당기자 그녀는 살짝 괴로운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김우영의 가랑이 사이에 파묻는다. 김우영이 그저 아무 말도 않고 정나은을 내려다보자 정나은은 한 박자 늦게 그의 뜻을 알아채곤 더욱 깊이 자신의 고개를 김우영의 가랑이 사이로 파묻는다.

곧이어 자신의 가랑이에서 질척하면서도 그 어떤 것보다 부드러운 그녀의 입과 혀의 감각이 느껴지자 만족스런 기분을 느끼며 편안하게 몸을 눕힌다.



“흐음~좋군.”



김우영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봉사를 받으며 낯선 안방의 전경을 휙 둘러본다. 그녀의 깔끔한 성격이 묻어나는 깨끗하면서도 절제된 분위기가 지배적인 방. 필요 이상의 가구조차 없어 붙박이 옷장이나 속옷 같은 것을 넣을 작은 서랍, 화장대 역할을 같이 하는 커다란 거울이 놓인 책상이 끝이다.



‘응? 저건?’



전체적으로 방 안이 어두웠고, 지금까지는 그녀를 탐하느라 정신없어서 보지 못했던 한 가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집안 어딘가에 하나쯤은 걸려있는 두 사람의 결혼사진.

벽 한 편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의 결혼사진에 김우영은 흥미가 솟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단연 순백의 신부다. 곱게 틀어 올린 머리, 검은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아름다운 은색 티아라와 순백의 면사포, 그 어느 때보다 뽀얗고 빛나는 순백의 피부와 부끄러운 듯 홍조가 살짝 올라와 있는 뺨, 항상 매섭게 치켜 올라가 있던 눈매는 부드럽게 휘어있고, 검은 눈망울에선 행복의 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온통 새하얀 모습과 달리 붉디붉은 두툼한 입술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이란 감정이 걸려 부드럽게 휘어있고, 하늘하늘한 프릴이 많은 웨딩드레스 대신 그녀의 취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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