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별 야설] 동생 다음 세상에서 함께 고향가세!-단편 - 딸타임

동생 다음 세상에서 함께 고향가세!-단편

동생 다음 세상에서 함께 고향가세!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하나쯤은 비밀을 가지고 있으며 그 비밀은 누구에게도 발설을 하기 싫어한다.
나의 경우 고향을 물으면 정말이지 아주 난처해진다.
고향을 말하길 꺼려한 사란이 하나 있었으나 그 사람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가 누구인가?
아니 정확하게 말하여 그녀가 누구인가?
내 마누라이자 이도 정확하게 말한다면 나보다 2살 연상인 나의 친누나였다.
그래 그렇다.
난 나의 친누나와 살을 섞고 살았으며 그 결과로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낳아 지금까지 잘 길렀고 그리고 지금은 아들과 며느리에게 얹혀사는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이나 며느리 그리고 사위들이 몰라서 그렇지 아이들과 며느리 그리고 사위에 대한 인척관계를 굳이 따진다면 엄청 복잡한 사이가 될 것이다.
즉 나의 직접적인 핏줄이지만 나를 빼고 마누라 아니 누나 입장의 애들로 본다면 아들은 누나 아들이니 조카가 될 것이고 그 조카와 결혼을 한 며느리는 질부라고 부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할 것이며 딸들 역시 누나 딸이기에 조카란 호칭이 걸맞은 것이며 그 딸들과 결혼을 한 사위들은 사위라고 그냥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조카사위라고 불러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마누라가 살아생전에는 물론이었지만 마누라이자 알고 보면 이미 고인이 된 친누나이지만 누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서라도 누나라는 여자는 이 세상에 아예 존재를 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만들고 나의 사랑을 받아주고 바랑을 베풀어준 마누라라는 이름을 아이들과 며느리 그리고 사위들의 마음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게 하고픈 마음뿐이다.

지금 내 나이 일흔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친누나 아니 내 마누라가 살아생전에는 물론이고 죽고 나만 남은 지금까지도 난 교향에 가 보지도 못 하고 지내는 형편이다.

내 고향!
보통 사람들은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 심지어는 경남북 전남북은 물론이고 제주도에서도 서울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것이 보통이다.
옛말처럼 사람이 태어나면 한양으로 보내고 말이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란 말처럼 말이다.
그런데 난 지금 서울이 아니라 남쪽의 작은 군 소재지의 장터 근처에 터전을 잡고 살고 있는 것이다.
몰론 친누나와 처음 야반도주를 하였을 때는 서울에서 살았다.
그러나 나이 스물 셋인가에 서울에서 고향사람은 만나고는 그 길로 누나와 난 서울 살림을 접고 정리하여 남쪽의 큰 도시로 왔지만 땅덩어리가 손바닥만한 대한민국이었던지 삼십을 조금 넘기고 또 고향사람을 그 도시에서 만났고 집을 집요하게 묻기에 다음에 만나면 초대를 하겠다고 하고는 그 길로 난 다시 누나와 하던 가게를 급하게 정리하여 단봇짐을 쌌고 그리고 지금의 군소지의 장터에서 난전 장사를 하다가 요행이 운이 좋았던지 지금의 집을 마련하였고 그리고 여태껏 눌러 살고 있으며 하던 장사도 아들 녀석이 나와 마누라 뒤를 이어 하고 있다.

그럼 내가 친누나였던 마누라와 야반도주를 하게 된 경위의 이야기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풀어보기로 하겠다.
내 고향!
그렇다!
내 고향은 서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아니한 경기도의 좀 깊은 곳에 위치한 곳이다.
아니 군까지는 정확하게 밝히긴 어렵지만 삼팔선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그런 곳이며 그도 당시에(지금은 전혀 모름) 버스가 다니는 찻길에서 거의 오솔길에 가까운 거리를 두 시간 남짓 걸어야 만이 도착을 할 수가 있는 산골오지마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얼마나 오지였던지는 내 나이 9살 때 터진 6.25사변 때의 일이 이를 증명을 해 줄 것이다.

북괴 괴뢰도당은 남한에 남침을 하고 놈들이 우리가 사는 산골오지마을까지 들어왔으나 모두가 일가친척인 관계로 누가 부르주아라고 누구를 고자질 할 일도 없었겠지만 고자질을 할 만한 사람도 없자 놈들은 농사일을 시킬 요량으로 키우던 소들 중에 겨우 암수 한 마리만 남기었고 그리고 젊은이들만 골라서 데리고 간 후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습을 보이질 아니 할 정도였다.
차라도 다닐 정도의 길이었다면 놈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며 우리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을 것이겠지만 겨우 오솔길 정도의 길을 두 시간이나 걸어서 들어와 봐야 건져 갈만 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들어오질 아니하였다.
물론 나중에 서울에서 만난 고향 사람들에게 끌려갔던 먼 친척뻘 되는 형들과 아저씨들의 안위를 물은 결과 몇 명은 살아서 돌아왔고 몇 명은 소식이 없다는 말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런 산골오지마을이었지만 그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앞에서도 잠시 언급을 하였지만 얽히고설켜 일가친척이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심한 경우 어떤 사람 가정하여 A 라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A란 사람하고 B란 사람은 육촌이나 칠촌 지간이라고 한다면 C란 사람은 A란 사람하고 사돈지간이면서도 B란 사람하고는 형제 내지는 아저씨 항렬이 경우도 있을 정도로 인척관계는 아주 복잡하였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서 모일 경우 모일 주체 즉 제사나 혼사의 경우 제주나 혼주와 가까운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즉 A란 사람 집에서 제사나 혼사가 있을 경우 C란 사람은 사돈 입장에서 참례를 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는 말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나의 친누나를 마누라로 데리고 산 것처럼 우리 고향마을 전체가 근친상간의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니 누구 집에서 제사를 지넬 날이 가까워오면 제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아이들이었다.
평소에는 공부하라 나무 해 오라 밭에 김매러 가자고 부모님들이 말하였지만 아무리 바쁜 농사철이라도 제사 전날부터는 일손을 놓고 제사를 지넬 집에서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엄마를 비롯한 여자들은 정지(부엌) 일을 도우며 갖가지 부침개와(기껏 해 봐야 감자전이나 고구마 전 메밀 전등의 산골오지에서 나는 것으로 만 전을 붙임)나물을 만들었고 남자들은 돼지를 잡거나 가을이면 지천으로 널린 도토리를 주워서는 도토리묵을 만들 재료를 준비 하는 등등의 잡다한 일을 하였으며 우리들처럼 어린 애들은 어른들 눈치를 보며 음식들을 훔쳐 먹거나 하거나 아님 얻어먹었고 밤이면 그 집의 방 몇 개에 나누어 비슷한 또래들끼리 이야기보따리를 풀기도 하였다.

그 또래라는 것이 애매하여 보통 중학생이상 이하 그리고 고등학생또래로 모여 놀았으나 판에서도 잠시 언급을 하였지만 북괴 괴뢰도당이 우리 마을에 들어와서는 소들 중에 겨우 암수 한 마리만 남기었고 그리고 젊은이들만 골라서 데리고 간 후로는 중학생 이상과 이하로 구분만 되었다.
고등학생도래 정도의 형들이나 아저씨뻘들은 북괴 괴뢰도당들에게 끌려갔고 여자들만 남자 그 누나 내지는 아주머니뻘들이 중학생 또래들과 어울려야만 하였다.

또 하나 특이하게 변한 것이라면 초등학교 아니 정확하게 말하여 국민 학생 또래라도 덩치만 크면 중학생 또래들과 어울리게 된 것이다.
즉 중학생 또래 내지는 그 이상의 남자들이 태부족하였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12살의 내가 바로 그 속에 들어 간 경우이다.
이는 나와 2살 터울의 우리 누나 그늘도 있었지만 누나하고 같은 나이였던 재종누나의 힘이 컸다.
누나와 같은 나이인 재종누나네 집은 우리 부락에서 제일 부자이기도 하였지만 중학교에 입학을 한 계집애답지 않게 이미 젖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할 정도로 성숙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난 어느 집에서 제사가 있기 전날이면 비슷한 또래들끼리의 이야기 마당에 가담을 하였는데 워낙 산골오지마을인지라 한여름이라도 밤이 되면 추위가 느껴졌기에 아궁이에 누군가가 군불을 때야 하였고 그 군불 덕에 달아오른 온돌방의 열기를 식히지 않으려고 요즘으로 치면 무명의 이불 호청 비슷한 것으로 몸을 덮고 엎드려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 눕는 자리도 말을 하진 않았지만 거의 지정이 된 것 같았다.

나의 경우 오른쪽은 나의 친누나가 누웠고 왼쪽은 재종누나 자리였다.
아는 거의 불문율에 가까웠다고 보면 될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나처럼 아니 나는 누나들을 좌우로 눕히고 누었지만 내가 나중에 본 것이 계기가 되도록 만들어준 먼 친척 형의 경우 그 형하고 먼 친척 동생 관계였던 누나보다 한 살이 많아 누나나 재종누나가 언니라고 부르던 누나하고 나란히 누웠는데 그 쌍이 나와 재종누나를 한결 가깝게 만들어준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런 이제 그 이야기 실타래를 풀어보기로 하자.
앞에서도 말하였지만 난 내 양 옆에 친누나와 재종누나를 나란히 하고 누워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누나와는 아무런 일이 없었지만 재종누나와는 이불호청 안에서 은밀한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이는 모두가 재종누나가 먼저 시작한 일이기도 하다.
친누나와 재종누나 덕에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중학생 이상의 또래들이 모이는 방으로 간 첫 날 일이다.
이야기를 한참 경청하는데 나의 허벅지 뒤쪽 살에 뭔가가 닿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떨리는 여자의 손길이었다.
친누나를 봤으나 친누나는 이야기를 듣느라고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반면 다른 내 옆에 누운 재종누나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은밀하게 자신의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슬며시 웃고는 이내 이야기를 듣는 척 하면서 계속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점점 손을 위로 올라왔고 그리고는 엉덩이를 쓰다듬었고 점점 밤이 깊어가면서는 손은 밑으로 내려왔고 비록 바지 위이지만 좆을 주무르기에 까지 이르렀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몇 날 아니 몇 달을 태연하게 넘어갔다.

다시 누구 집인가의 제사 전날 마치 약속이라도 하듯이 우리들은 나란히 자리를 잡고 누웠고 그렇게 누우면 마치 재종누나의 손길은 나의 몸을 더듬었고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더듬어 주길 바랐고 그 바람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재종누나의 손길은 일찌감치 내 엉덩이를 쓰다듬다가는 나의 거부감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이내 재종누나의 손은 밑으로 파고들었고 그것을 가다린 난 재종누나가 쉽게 손을 쓰도록 엉덩이를 들어주는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날은 겨울이 지나고 막 깊은 산골에도 봄이 찾아오기 시작을 하던 날이었지만 이불을 두터운 것을 덮었기에 엉덩이를 여간 들어도 표도 안 났지만 모두들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걸 안 재종누나는 더 대담하여지기 시작하였다.
바지 안 아니 정확하게 말하여 사리마다 안까지 손을 넣고는 이유도 모르게 발딱 선 좆을 잡고는 주물럭거리더니 이불을 더 올려 목덜미까지 올리는가 싶더니 나의 손을 당겨서는 자신의 부풀기 시작한 가슴 밑에 넣게 하고는 풍성해 가는 젖가슴의 감촉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눈치를 살피더니 그 손을 당겨 자기 치마 위이지만 보지 둔덕의 금의 갈라진 느낌을 느끼도록 까지 해 주며 얼굴을 붉혔다.

“상근아 나무하러 안 가니?”그로부터 몇 칠 후 마당에 앉은 나를 발견한 재종누나가 먼저 말을 걸었다.
“왜 누난 나물 캐게?”재종누나 손에 바구니가 들린 것을 보고는 지게를 짊어지며 물었다.

사실 그랬다.
당시에도 도시에서는 연탄이란 것을 사용하고 일부는 나무를 해서 연료로 사용하였지만 우리처럼 깊은 산골오지마을에서는 나무가 연료의 전부였다.
초가을부터 시작되는 겨울나기 장작의 경우 어른들의 몫이었지만 봄이나 여름 가을에 정지에서(부엌을 말함)밥이나 꾹 그리고 숭늉을 끓이는데 사용하는 땔감은 거의 아이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지천으로 돌아다니는 뱀이며 산짐승 덕에 혼자 산에 올라가는 일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었기에 나처럼 어린애들은 함께 모여서 산에 올라가 놀다가 나무를 하여 내려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도 같이 올라갈 형들이나 친구들이 오면 함께 가려고 미리 지게까지 옆에 두고 놀던 참에 재종누나가 나물을 캔다며 함께 가자고 하기에 따라 나선 것이다.

“상근아 전번에 거기 만졌더니 많이 컸더라.”한참을 산길에 앞장서서 오르더니 재종누나가 오르다 말고 서더니 내가 올라가자 나의 바지 중앙을 매려다보며 손을 잡고 말하였다.
“..........”난 재종누나의 말뜻을 알기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만져보면 아니 직접 보여주면 안 되겠니?”재종누나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시선을 거기에서 때지를 못 하였다.
“봐”하고 바지를 내리려 들자
“아니야 여기엔 언제 사람들이 지나 갈지 모르잖아? 저기 안으로 가자”하고는 나의 손을 잡은 체 산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향하였다.
다른 숲 같으면 막 봄이 시작이 되는 시점이라 나뭇잎도 거의 없고 칡이나 줄기 식물들도 축 늘어진 상태라고 하지만 지나가기가 어려운 숲이었지만 이상하게 재종누나가 가는 길을 힘들지만 겨우 사람 하나는 지나 갈 수가 있을 정도는 되었다.

“오빠 살살”얼마나 깊이 들어갔을까.
사람이 있었던지 인기척이 들렸다.
그러자 재종누나는 소리를 내지 말라는 투로 손가락 하나로 자기 입을 막았다.
거기에는 누구의 무덤인지 모르지만 두 봉의 무덤이 나란히 있었고 그 사이에 사람이 있었다.
누운 사람의 종아리 부분은 검은 피부였지만 종아리 윗부분이 하얀 것이 분명히 여자였고 등과 알몸의 아랫도리와 때로 얼룩이 진 상의의 형태나 까까머리로 봐서는 여자로 보이는 사람을 깔로 올라 탄 것은 분명히 남자였다.
밑에 깔린 여자는 자기 치마로 보이는 것을 풀밭에 깔았고 그 위에 무엇인지 모르지만 거무튀튀한 것이었지만 자세히 보면 흰색의 옷 같은 것을 덧깔린 것 같았으나 그것의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재종누나도 그 두 사란의 정체가 궁금하였던지 조금 뒤로 물러나더니 돌았고 그리고 나무숲에 숨어서 그 수수깨끼의 두 사람 정면 조금 옆에서 우리는 그 두 사람의 정체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밑에 깔린 여자는 재종누나나 친누나에 비하여 한 살이 많아서 재종누나나 우리 누나가 언니라고 부르던 나로서도 정확한 인척관계도 모르면서 누나들이 언니라고 부르기에 누나라고 부르던 당시 누나들보다 한 학년 높은 중학교 2학년의 누나였고 그 누나를 깔고 위에서 놀랍게도 재종누나가 제사 전날이면 만지기를 좋아하던 좆을 보지에 박고 엉덩이를 들썩이던 남자는 누나들은 오빠라고 부르고 나는 형이라고 부르던 형으로서 북괴 괴뢰도당은 남한에 남침을 하고 놈들이 우리가 사는 산골오지마을까지 들어왔던 날 놈들이 들어오는 것을 제일 먼저 보고는 산으로 도망을 간 덕에 끌려가지 아니한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친척 형이었다.
밑에 깔린 누나는 그 형의 목에 매달리며 안간힘을 썼고 위에 올라탄 형은 좆을 그 누나 보지에서 빼지 아니하고는 어떤 때는 빠르게 어떤 때는 아주 천천히 들락날락 시키며 숨을 고르기도 하더니 한참 후에는 갑자기 꼬꾸라졌다.
“으~~~~~”그리고는 알 수가 없는 신음을 하였다.
“오빠 좋았어?”밑에 깔린 누나가 환하게 웃으며 물었다.
“응 좋았어. 넌?”그 형이 물었다.
“몰라 하지만 오빠만 좋다면 난 그냥 좋아”하고 말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누나는 좆 맛도 모르면서 그냥 그 형이 좋다고 하니 대어 준 것으로 사료가 된다.

“!”그리고 그 형이 일어나자 난 그 형의 좆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그 형의 좆에는 오줌이 아닌 하얀 물이 묻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밑에 깔렸던 누나가 일어나더니 그런 놀이를 한 형에게 자신의 다음 모습을 보이기 창피하였던지 몸을 돌렸고 그 덕에 재종누나와 난 그 누나의 알몸을 정면으로 보게 되었으며 보지에서도 하얀 물이 흐르는 것을 확인하였고 치마 위에 덧깔린 것의 정체가 그 누나의 사리마다인 것은 그 누나가 그 사리마다로 흘러내리던 보지의 하얀 물을 닦는 것을 보면서 알게 되었다.
그 누나는 자신의 사리마다로 보지만 닦은 것이 아니라 그 형의 좆도 자신의 사리마다로 닦아주더니 그 더렵혀진 사리마다를 개의치 아니하고 입더니 치마까지 입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가 왔던 그 길 같지 않은 길로 내려갔다.

“누나”그들이 사라진 후 내가 먼저 누나를 불렀다.
“쉿 아직 조용”누나가 내 입을 막았다.
“금방 본 것 누구에게도 말 하면 안 돼 알았지?”재종누나가 입을 연 것은 거의 십 분 이상이 지난 후였다.
“경수 형하고 미숙이 누나가 한 게 뭐야?”난 호기심에서 물었다.
“너 혹시 개들 붙은 것 봤니?”재종누나가 물었다.
“아~헐레?”하고 말하며 웃었다.
요즘이야 아이들이나 어른들도 섹스니 조금 난잡한 표현을 쓴다면 빠구리라는 말을 쓰며 더 험한 경우라면 씹이란 단어를 쓰지만 당시에는 헐레란 단어를 썼었다.
“응”하고 대답하였다.
“왜 하지?”난 궁금증이 더 하였다.
“좋아하면 하는 거야”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였다.
“누나처럼 만지는 것도 좋아하면 하는 거야?”다시 물었다.
“그....그렇지”재종누나가 말을 더듬었다.
“누나 그런 우리도 그렇게 해 보자”사건의 발단은 그 말에서부터 시작이 된 것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경수 형하고 미숙이 누나가 무덤 옆에 숨어서 씹을 하는 광경을 목격함으로서 발생을 하였고 나란 인간과 누나 아니지 마누라를 고향에서 멀리하게끔 만든 동기를 준 것이라고 보면 무방할 것이다.
“..............”재종누나는 나의 그런 제안에 놀랐던지 토끼눈을 하고 나를 봤고 난 개의치 아니하고 바지를 내리고는 발기가 될 대로 된 좆을 재종누나 얼굴 앞에 들이 밀었다.

“비밀 지키지?”한참을 나의 좆을 노려보던 재종누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응 지켜”난 그때까지도 엎드려 있다가는 일어나던 재종누나의 손을 잡고는 나의 발기가 된 좆을 쥐어주며 말하였다.
“그래 그런데 말이야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처음이거든 그리고 처음하면 아프고 피도 나와 알았지?”재종누나는 나의 좆을 잡고는 경수 형하고 미숙이 누나가 헐레를 하였던 곳으로 천천히 이동을 하며 말하였다.
“많이 아파? 피도 많이 나와?”아프다는 말에도 놀랐지만 피가 나온다는 말에는 더 놀랐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에 애들끼리 싸움이 붙으면 아무리 등치가 좋은 놈이라도 코피나 피를 먼저 보면 무조건 졌기 때문에 피를 본다는 것은 태배를 인정한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기에 피란 말이 나오자 덜컥 겁이 났던 것이었다.
“아니 참을 만 하대 피도 조금 나오다 말고”재종누나가 오히려 날 안심을 시켰다.

“얜? 처음엔 남자가 여자 치마 정도는 벗겨줘야 한 대”난 누나가 가만있자 바지를 내렸고 그러자 재종누나가 눈을 흘기며 말하였다.
“아....알았어.”하고는 재종누나 앞으로 가자 재종누나는 웃으며 몸을 돌렸고 난 검정 치마의 허리를 풀었고 치마는 스르르 밑으로 내려갔고 그리고 미숙이 누나의 사리마다보다는 훨씬 하얀 사리마다가 나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재종누나는 미숙이 누나가 하였던 것처럼 치마를 먼저 풀밭에 깔고는 사리마다를 치마 위에 덧깔았다.
그리고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나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부끄러웠던지 막 부풀며 형태를 보이기 시작한 젖가슴을 한쪽 팔과 손으로 가렸고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보지를 가렸다.
경수 형이 미숙이 누나 위에서 하였던 것처럼 재종누나 몸 위에 올라탔지만 보지 어느 부분에 좆을 박아야 하는지는 멀리 있었기에 자세히 살피지 못 하여 엉거주춤한 자세로 재종누나 보지에 좆을 닿게 한 상태고 있어야 하였다.
“상근아 천천히 박아”재종누나가 나의 발기되 좆을 잡더니 보지 제일 밑 부분에 닿게 하여 금 안으로 조금 넣게 하고는 말하였다.
“응”난 대답을 하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낮추었다.
“으~~~천천히 으~~~~천천히”좆이 조금씩 들어가자 재종누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계속 천천히 라고 나직하게 말하였다.
“어! 누나 아까 경수 형 좆은 미숙이 누나 보지에 완전하게 들어갔는데 왜 난 들어가다 말아?”좆이 더 전진을 못 하자 재종누나 얼굴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그렇지? 힘껏 눌러”하고 말을 마치기 무섭게 재종누나는 자신의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응!”대답과 함께 힘주어 눌렀다.
“윽!”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는다고 막았지만 재종누나 입에서는 비명이 나왔고 좆 전체의 따스함을 느끼며 밑을 봤을 때는 이미 나의 좆은 재종누나 보자가 모조리 먹어버린 것처럼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상근아 가만있다가 하라고 하면 해”재종누나가 내가 엉덩이를 움직이지 못 하게 두 발로 엉덩이를 감으며 말하였다.
그렇게 하여 난 재종누나의 보지에 좆을 박기는 박았고 잠시 후 엉덩이를 풀어주기에 경수 형이 하던 것처럼 움직여봤으나 좆만 자주 보지에서 빠질 뿐 아무리 하여도 경수 형처럼 나의 좆에서는 하얀 물이 나오질 아니하였다.
하지만 좆으로 전해오는 따스함과 그리고 나도 모르게 생기는 호기심으로 인하여 난 툭하며 재종누나를 불러내어 그 무덤으로 데리고 가서 헐레를 하였고 또 경수 형이랑 미숙이 누나가 같이 가는 것도 몇 차례 목격하였고 그럴 때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재종누나와 난 그 형과 누나 뒤를 밟아서 따라가 그들이 하는 것을 자세히 봤고 보고나서 그들이 사라지면 다시 나와 재종누나는 서로 맛도 모르면서 호기심어린 행동을 곧잘 하였다.
그리고 내 나이 12살이 되던 해 말에 난 재종누나 보지 안에 경수 형처럼 하얀 좆 물을 뿌리는데 성공을 하였다.
재종누나와 난 내 나이 13살이 되던 해까지도 아무 일이 없이 그 짓은 반복이 되었다.

“너 종숙이랑 머 하기에 그렇게 자주 산에 오르니?”내 나이 13살이 되든 해 여름의 어느 날 그날도 난 재종누나하고 무덤으로 가서 즐기고 내려왔고 그 내려오는 것을 나의 친누나가 목격을 하고 말았고 누나는 나를 조용하게 부르더니 물었다.
“그냥 난 나무하고 누나는 나물 뜯었어.”시치미를 때고 거짓말을 하였다.
“아닌데 누가 그러던데 너랑 종숙이 연애 한다며?”누나가 핵심을 찔렀다.
남자 애들 사이에서는 그런 소문이 나지 않아 몰랐지만 계집애들 사이에서는 나와 재종누나가 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난 생태란 것을 그때서야 난 알았다.
그리고 그 소문의 진원지가 바로 경수 형하고 연애질을 하던 미숙이 누나라는 것도 말이다.
우리가 그들이 연애질 하는 모습을 훔쳐 본 것처럼 그들도 우리가 연애질을 하는 것을 훔쳐봤던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경수 형은 나와 연애질을 하던 재종누나인 종숙이 누나에게 협박을 하여 종숙이 누나고 가끔은 범하였다는 것은 나중에 누나와 야반도주 하면서 누나 입으로 들려준 말이기도 하였다.

“...............”소문의 진원지까지 말하는 데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했지? 바른말 해”누나는 나의 입으로 확인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재종누나와 우리 누나는 나이도 같고 생일도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그런 사이였지만 재종누나 집이 우리보다 부잔인 것에 요즘말로 콤플렉스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기에 무엇이든지 지기를 싫어하였다.
초등학교만(당시엔 국민 학교)졸업을 하고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하는 형편이면서도 누나는 나물을 캐러 간다거나 밭을 매는 것이라도 한 발짝 먼저 하고 한 움큼이라도 더 캐어야지 마음이 편해 하였지 죽어도 재종누나인 종숙이 누나에게는 지기 싫어하는 그런 무서운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전쟁이 끝나고 늦게나마 재종누나는 중학교에 다녔고 먼 길이기에 자전거까지 타고 다니는 그 모습은 우리 누나의 질투심을 더 부추기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까지 재종누나하고 연애질을 한다는 소문을 들은 우리 누나는 거의 미칠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시쳇말로 문 불이 안 가려진 상태까지 가고 만 것이었다.
“어서 말 안 해!”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대고는 마치 때릴 기세를 하며 재촉하였다.
힘으로나 등치로 질 내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완력으로 누나를 물리친다면 그 후환이 두려웠다.
분명히 엄마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다리몽둥이가 성할 리가 없을 것이란 것은 짐작을 하고도 남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해......했어”하는 수 없이 실토를 하여야 하였다.
“언제부터?”누나가 토끼눈을 하고 다시 물었다.
“여.....열.......두.......살”겨우 대답을 하였다.
“따라와”난 누나 손에 이끌려 집으로 가야 하였다.
거기서 문제가 생기고 만 것이다.

같은 나이인 종숙이도 했는데 나라고 못 할 리가 없는 것이 누나의 말이었고 마침 집에는 아무도 없던 터라 장소 좋고 시간 좋은 것이었다.
“어서 나랑 도 해”집 뒤에 있던 헛간으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누나는 치마를 들치고 사리마다를 훌렁 벗더니 불을 붙이면서 볼 쏘시개로 사용하려고 모아둔 나뭇잎과 잔가지 위에 벌러덩 눕더니 명령조로 말하였다.
이성이 눈을 떴더라면 그 상황을 쉽게 모면을 하였겠지만 감성이 더 발달한 나이인 14살 사내 눈인 내 눈에는 누나가 누나로 보이질 아니하고 비록 하체만이지만 벌거벗은 누나는 누나가 아닌 단순한 여자로만 보였고 그런 난 거침없이 바지와 사리마다를 발목까지만 내리고는 이게 왠 떡이냐 라는 마음만으로 난 누나 몸에 올라타고는 좆으로 누나의 처녀를 앗아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면 지금처럼의 내가 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나는 내가 재종누나인 종숙이 누나하고 연애질이라도 한 느낌이 들기만 하면 무조건 나의 하고 싶고 안 하고 싶은 욕망과는 무관하게 날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서 자기를 범하게 만들었다.
거의 1년을 난 재종누나인 종숙이 누나하고 친누나 사이를 오고가며 수시로 즐기며 살았다.

“상근아 큰일 났다”15살이 되었고 누나는 17살이 되던 해 봄에 문제가 발생을 하고 만 것이었다.
“왜? 무슨 일이야?”누나의 숨넘어가는 소리에 차분하게 물었다.
“종숙이가 임신을 한 모양이야 월경이 없대”천지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아니 뭐라고?”놀라며 묻자
“근데 나도 이번 달에 지났는데 없어”누나의 풀죽은 목소리는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어.....어쩌지?”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너 조용히 있어”누나가 무언가 작심을 한 듯이 말하고는 엄마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너 간단하게 입을 옷 몇 개만 보퉁이에 싸서 나와”하고는 누나는 급하게 자기 방으로 갔다.
난 연유도 모르면서 누나가 시키는 대로 방으로 들어가 옷가지 몇 개만 주섬주섬 보퉁이에 쌌다.
“어서 나와 어서”누나가 재촉을 하였다.
“됐어”보퉁이를 들고 마당으로 나가자 이미 누나는 나보다 더 큰 보퉁이를 들고 발을 동동 굴리고 있었다.
“가자”누나가 앞장을 섰다.
누나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산길로 굽이굽이 돌며 걸었다.
그러면서 누나는 나에게 말하였다.
몇 칠전 아버지가 돼지 한 마리를 장에 내다 팔아서 숨겨 둔 돈을 훔친 것이고 그 돈으로 여비를 하여 서울로 가서 둘이서 살자는 것이었다.

고달픈 서울 생활이 시작이 되었다.
여비를 하고 남은 돈이라고는 쥐꼬리 정도가 전부였기에 그 돈으로 방을 얻기에는 태부족이었다.
요행이 누나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지금 생각하면)숙식만 제공하는 봉제공장에 취직을 하였지만 문제는 나였다.
나이 15살에 불과한 시골뜨기였지만 등치는 고등학생보다 좋았고 힘도 아주 좋은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누나와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는 누나를 봉제공장으로 들여보내고 난 누나가 안심을 하도록 호기에 찬 걸음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날 반겨 주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내가 눈길을 돌린 것은 구두닦이였다.
밑천도 거의 안 들고 손쉽게 돈을 버는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도 왕초가 있고 번 돈의 전부를 그 왕초란 자에게 바쳐야 잠재우고 밥을 먹인다는 사실을 몇 칠을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역이나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새우잠을 자 가며 터득을 한 것이었다.
난 그 왕초 중에 한 명에게 접근을 했다.

요즘으로 치면 면접에 해당하는 것을 먼저 하였다.
난 고향을 묻기에 지금은 북한 땅이 되어버린 곳의 지명을 말하여 속였고 나이를 묻기에 나이는 진짜 나이를 말하였고 왕초 밑에 있던 등치가 산만한 놈하고 팔씨름을 시켰으나 난 단방에 넘어트렸고 그러자 왕초는 놀라며 자기 휘하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15살이란 어린 나이에 난 일약 왕초의 친위대가 되어 왕초 곁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왕초의 도움으로 누나는 누나대로 다른 성씨는 물론이고 이름까지 바꾸어 호적을 만들었고 난 나대로 아버지의 성은 따랐으나 새로운 본적지와 새로운 이름으로 개명을 하여 호적을 만듦으로 난 아버지와 엄마와의 인연을 마감하게 만들고 말았는데 이는 배우지 못 한 소치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누나가 나와 살아야 하며 안정이 되면 살림도 살아야 한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난 누나와 수시로 만났고 만나면 제일 먼저 씹을 하고 그 다음에서야 우리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

참 눈치 빠른 사람들이라면 지금까지의 이야기 중에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건 누나의 임신이었다.
그랬다.
서울에 와서 비싼 돈을 들여 진찰을 받은 결과 누나는 임신이 맞았다.

어쩜 누나의 임신 때문에 내가 구두닦이 왕초 휘하로 들어가기로 작정을 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난 왕초 휘하로 들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누나를 당시 엄청 성행하던 돌팔이 의사에게 데리고 가 이이를 지웠다.
누나는 안정된 마음으로 봉제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나 역시 왕초 밑에서 열심히 꼬봉(부하)노릇을 하였다.

내 나이 23살이 되어서는 그 세계의 우리 조직에서는 당당하게 이 인자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깡패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나와 방을 얻어놓고 본격적인 동거를 하기 시작한 누나였다.
누나는 나에게 전과가 생기기 전에 군대에 입대하여 조직에서 떠나기를 간절하게 애원하였다.
난 그런 누나의 소원을 뿌리칠 힘이 없었다.
주먹세계에서는 알아주는 건달이었지만 누나 앞에서는 남들이 아는 동거인이 아닌 나약한 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난 왕초에게 조직을 떠나고 싶다고 말하였고 군대에 자원입대를 하겠다고 하였다.
왕초는 아까워하면서도 나에게 승낙을 하였고 그리고 예전에 자기 휘하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 밑에서 번듯하게 공부하여 ROTC로 육군에 장교로 있다가 소위 말뚝을 박고 있던 중위에게 소개가 되었고 그 중위는 나에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기에 그 전에 누나와 상의를 하였던 자동차 정비 쪽에서 근무를 하였으면 한다고 하였더니 그 중위는 어떻게 손을 썼던지 논산에서 훈련을 받고는 난 남쪽에 있던 차량재생창에 배치가 되었다.

참 결정적으로 내가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 해야겠다.
누나와 함께 야반도주 하다시피 고향을 떠나온 후 난 우연히 고향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 사람은 서울에 무슨 일인가 일을 보러왔다가 소매치기를 당하였는데 그 소매치기가 우리 조직원의 일원이었고 그 소매치기는 우악스런 손에 잡혀 있다는 급보를 받고 달려간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조직원인 소매치기를 잡고 있던 사람이 바로 고향사람이었다.
그 덕에 조직원은 경찰에 넘기지 않고 무사히 구출을 하였으나 문제는 그 사람이 나와 누나에 대하여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었다.
여차하면 고향의 부모님들이게 알려질 것이고 또 그렇게 되면 부모님이 달려오면 누나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나나 누나는 다리몽둥이가 부러지거나 누구 하나는 죽어야 할 판이란 것을 알았다.

난 나를 따라온 꼬봉들에게 자리를 먼저 뜨라고 신호를 준 후에 조직원들이 모조리 사라지자 고향사람은 안정을 시키고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는 바로 도망을 쳤고 즉시 누나에게 달려가 사실을 말하자 누나가 군대에 입대를 해 버리라고 하였던 것이었다.

후방으로 배치를 받자 누나도 서울 살림을 접고 내가 군대생활을 하던 부대 근처로 이사를 하였다.
요즘이야 부모님이 면회를 가야만이 외박이 가능하였지만 당시에는 외박을 간다고 하면 상사들이 좋아하였다.
소위 밥그릇 하나가 줄기 때문이었다.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인지라 사병 하나가 외박을 가면 하사관은 그 사병이 먹을 양의 쌀과 보리쌀을 빼돌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난 토요일이면 외박을 나왔고 나오면 밤이 새는지도 모르고 누나와 뒹굴었다.
그리고 제대 말년에는 누나가 나의 아이를 임신하였고 그 애가 지금은 자라서 나의 뒤를 이어서 자동차 경정비를 하고 있다.

제대를 하고는 자동차 운전을 하였다.
운전기사로 취직은 아주 쉬었다.
요즘이야 개나 소도 운전을 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운전사는 많아도 운전기사는 찾기 힘들다.
무슨 말이냐고 반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요즘이야 운전면허 시험에 정비 부분이 출제가 안 되지만 예전엔 출제가 되었다.

물어보겠다.
전기기사가 뭔가?
전기 스위치 켜고 누를 줄 알면 전기 기사인가?
아니지 않는가.
전기기사면 적어도 전기를 100%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조작을 하고 수리를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운전기사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군대에서 운전병들은 어떻게 교육을 받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군대 생활을 할 때는 적어도 간단한 정비는 운전자가 하여야 했다.
그리고 엔진 등 아주 큰 수리를 요하는 경우에는 내가 군대생활을 하였던 차량재생창 같은 곳으로 보내져 수리를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아주 간단하다고 할 타이어 교체마저도 운전자 스스로가 하지 못 하고 자동차보험회사의 도움을 받는 모습을 보면 기도 안 찰 노릇인 것이다.

아이들이 하나 둘 불어나자 운전기사 노릇으로는 도저히 키울 수가 없었다.
누나 아니 마누라와 많은 상의를 한 끝에 자동차 경정비를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공구야 그 동안 수시로 모아 둔 것이 있었기에 얼마간의 돈을 들이 지도 아니 하고 문을 열었다.

요즘 아들이 하는 것을 보니 자동차를 들어 올리는 기계부터 갖가지 첨단장비들이 있지만 내가 처음 자동차 경정비를 할 당시에만도 작키 몇 개와 스패너 몽키 펜치 드라이버 렌치 등의 자질구래한 공구만 있다면 어떤 차도 수리가 가능하였다.
더구나 운이 좋았던지 자동차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정식 정비공장에 비하여 수리비가 훨씬 싸며 속도도 빠른 나의 경정비 업소에는 차가 끊이지 않을 정도로 많았고 소위 시다바리라는 애들을 3명이나 고용하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리 오래 하지를 못 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을 하고 말았다.
나이 사십이 다 된 나를 알아 본 사람이 온 것이다.
그는 내가 살던 곳의 공판장에서 생선을 사다가는 고향의 군 소재지 장에서 팔고 거기서는 감자와 매밀 등을 사서 부산으로와 도매로 넘기는 그런 장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먼저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형제들의 소식을 물었고 모두 편안하다는 말에 안도를 하였다.
또 거기서 난 나에게 처음으로 연애질을 하게 만들었던 재종누나의 소식을 접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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