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별 야설] 향기(香氣) - Renewal - 2부 - 딸타임

향기(香氣) - Renewal - 2부

내 나이 열여덟. 여느 다른 고2 애들이 그렇듯이 나의 학교 일과는 단순하기 그지없다. 8시에 등교. 9시에 수업 시작. 공부하고, 쉬고, 공부하고 ,쉬고 또 공부하다 쉬고, 그러다 점심 먹고 다시 공부하고 쉬고 공부하고 쉬고 그리고 종례. 수업의 내용만 바뀔 뿐 챗 바퀴 돌아가는 듯 한 단순 반복 그 자체의 시간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태엽을 감아 놓은 인형처럼 같은 것만을 반복하는 일과. 그게 나의 학교생활이었다. 가끔가다 재밌는 일이 터지긴 하지만 그건 그저 구경거리 일뿐 언제나 내일이 아니라 딴사람의 일이었다. 방관자.. 어떻게 보면 참 재미없는 일상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재미는 없다.

그렇다고 학교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학교탈출?? 이런 거 꿈도 꾸지 않는다. 아니 나는 오히려 이 지루한 학교생활에 아주 만족한다. 청소 할 일이 있나, 빨래해야 할 일이 있나, 가계부를 써야 하길 하나... 가만히 있으면 밥 나와, 책보고 싶으면 책 봐, 자고 싶으면 자, 놀고 싶으면 놀 수도 있다. 집에서는 자유롭게 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학교였다. 누가 학교를 감옥이라 하는가!! 이 자유롭고 안락한 이곳을~!! 학교는 나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쉼터였다. 그런 쉼터를 내가 왜 싫어하겠냐고...오히려 수업이 너무 짧아서 불만이면 불만이지..

땡땡땡...

오늘 내가 바친 하루의 종지부를 찍는 종이 울렸다. 아직 종례시간이 남았지만 몇몇 아이들은 벌써부터 가방을 싸며 분주하게 움직여댔다. 마치 모든 게 끝난 듯 좋다며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들., 이리저리 교실을 뛰어 다니며 장난을 치는 아이들. 종례만을 앞둔 교실의 풍경은 마치 남북이 통일이라도 된 것 마냥 들뜬 축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차피 끝나고 할 것도 없는 것들이..

<야!! 선생님 오신다!!>

교실 문을 박차며 뛰어 들어온 아이가 숨넘어갈 듯 한 얼굴로 헐떡이며 말했다. 조그만 체구의 아이의 얼굴은 비보라도 가져온 통신병처럼 비장하기까지 했지만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그 비장함은 어딘가 모르게 우스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여간 어느 교실가나 저런 놈들 꼭 있다. 저놈은 군대 가서도 걱정 없을 거다.

그리고 얼마 안가 그 통신병의 말대로 선생님이라고 지명한 한 여자가 교실로 들어와 천천히 교탁 앞에 섰다. 새하얀 화이트 배색과 귀여운 핑크 배색이 조화롭게 배치된 러블리한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지친 하루의 끝물의 시간대라는 것은 상관없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화사하고 밝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약간 아담 해 보이는 체격은 작다는 느낌보다는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느낌이 강했고 약간 동글동글하면서도 갸름한 얼굴은 동그랗고 몽글몽글한 이목구비와 잘 어울려져 전체적으로 꽤나 어리고 큐트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매번 볼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보기만 해도 답답하고 숨이 탁 막히는 교탁 앞에서 저러고 서있는걸 보면 뭔가 자기자리를 잘못 찾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드는 게 한 두번이 아니다. 명색이 선생님인데 당장이라도 아래로 내려와 교복을 입고 수업을 받아도 전혀 이상하게 없을 정도로 어리고 귀여운 페이스는 조금 반칙이 아닌가 싶다. 보는 나야 좋지만..

<자~ 요새 날씨가 많이 더워 졌죠, 오늘 하루 종일 공부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수고 했어요..>

얼굴 만큼이나 앳띈 느낌이 드는 목소리로 시작되는 종례시간은 역시 언제나 그랬듯 변함 없는 레파토리 이어져갔다. 더울 땐 날씨가 덥죠, 추울 땐 날씨가 춥죠, 좋을 땐 날씨가 좋죠. 누가 보면 기상청에서 파견 나와 실시간으로 일기예보 하는 줄 알겠다.

<자..그럼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고 이상 마치겠어요>
<차렷!! 선생님께 경...>
<아..잠깐..잠깐만요..>

갑자기 뭔가 생각 난 듯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반장의 말을 막자 여기저기서 어우~하는 서운함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연한 반응이다. 종례시간을 질질 끄는 건 수업종치고 5분만 더 하는 거랑 거의 비슷하게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니까..

<미안...빠뜨린게 있어서....>

미안한건 아나보다. 선생님은 바로 잘못했다는 듯 두 손을 겹치며 귀엽게 눈웃음을 치며 미소를 지어왔다. 다 자라고도 남았을 성인이라고는 믿기 힘든 그 귀여운 웃음에 어느새 서운함의 소리가 잦아 들어간다. 역시 이쁘면 모든 게 용서가 되나보다. 하긴 저 웃음을 보고 화를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 싶다..

<음...한강혁..>

익숙한 이름이다. 왜?? 내 이름이니까..

<강혁이... 없니??>>
<아뇨..저 여기 있는데요...>

갑작스런 선생님의 호명에 멍하니 있던 나는 그제서야 손을 들고 대답을 해갔다.

<어...강혁이는 끝나고 이따 상담실로 좀 와줘요~ 그럼 이상.. 아! 인사는 생략할께요~>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듯 말하며 밝은 미소와 함께 선생님이 교실 밖으로 나가자 그제서야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을 지르며 너도 나도 교실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뭐가 그리 급한지 가다가 넘어지는 놈들도 더러 보인다. 저렇게 있기 싫은걸 어떻게 참았을까..나중에 보충에 야자라도 한다고 하면 학교 때려 칠지도 모를 놈들이다.

<어이~마누라~>

등 뒤에서 들려오는 중저음의 꽤나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한 사내놈이 나를 향해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서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곱상한 얼굴을 가져 누가 봐도 잘생겼다는 느낌을 풍기는 녀석은 누가 봐도 호감을 가질 만한 하지만 나로서는 징그럽기 그지 없는 느끼한 웃음을 흘리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저 자식 또 저렇게 부른다.. 단어의 의미를 모르는건가?? 방금 나를 마누라라고 부른 이 사내자식의 이름은 유지환. 내 초등 학교 때 친구이자 중학교 때 친구 그리고 고등학생인 지금까지 나의 친구라는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몇 안 되는 놈 중에 하나이다. 한마디로 질긴 인연이라는 거다. 아니 나는 간간히 악연이라고도 말한다.

<야...너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크크~왜?? 좋기만 한데...흐흐>

언제부터였을까 이 자식은 가끔씩 이렇게 뜬금없이 나를 마누라라고 부를 때가 있다. 이유가 뭔진 모른다. 그냥 10년의 다되가는 길다면 긴 세월을 질기게 이어온 것에 대한 애정의 표현인지 그냥 나의 생활 패턴에 대한 재미난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듣는 나로서는 상당히 고역이다. 내가 불러도 시원찮을 저 살가운 단어를 저런 기름진 목소리로 듣고 싶지는 않다고..

<좋기도 하겠다. 난 지극히 정상적인 취향이라고.. 너의 그 느글거리는 목소리로 내가 미래에 뱉어야할 말을 들을 만큼 이상성애자는 아니란 말이다..>
<그럼..여보~ 라고 불러줄까??>

그건 더 싫다. 너의 느글거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아름다운 단어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가지게 하지 말아달란 말이다.

<불러...그럼 널 니 미래의 진짜 여보도 못 보게 만들테니까...>

좀만 더 하면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이 손에 쥔 볼펜으로..

<크크...알았다...그만 할게...그러다 진짜로 그렇게 되면 큰일 나니까...흐흐>

나의 살기어린 협박에도 뭐가 그리 재밌는 건지 한참을 킥킥대던 녀석을 나는 그저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이건 얼굴도 멀쩡하게 생긴 게 가끔씩 똘끼가 넘친단 말야...이상한 놈이야..

확실히 녀석의 얼굴은 꽤나 핸섬한 편이었다. 날렵한 턱 선에 뚜렷하게 보이는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는 절로 미남이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화가 잘 돼있었다. 거기에 꽤나 길어 보이는 기럭지는 그런 외모를 받쳐주며 녀석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빠질거 없이 잘생긴 놈이라는 거다.. 젠장..내주위에는 부러워할 이기적인 유전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이놈의 불공평한 세상..

<그나저나 마리아는 너 왜 부르는 거야??>
<마리아??그게 뭐냐??>
<너 마리아도 모르냐??>
<나...성당 안다니는데....>

내가 뭐 잘못 말했나?? 그때까지 약 먹은 미친놈 마냥 실실대던 지환이 녀석이 뭔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당이 아니라 교횐가?? 아닌데 교횐 예수잖아.. 뿌리는 거의 같았지만 엄연히 분야가 다르고 두 분다 맡고 있는 자식들이 다르다.

<하아...이 불쌍한 중생아...너 학교는 나오는거 맞냐?? 어떻게 담탱이 별명도 모르냐..>

그게 별명이었냐??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누구냐.. 그런 유치한 별명을 붙인 놈이..그 최악의 작명 센스에 경의를 표한다고 나 대신 좀 전해줘라.

<그러게 매일 집안일에만 관심 갖지 말고 학교생활에도 관심을 좀 가져라..여자도 좀 만나고 놀 땐 놀면서 이 꽃다운 고교 생활을 좀 즐기란 말이다..>
<너나 많이 해라..여자 만나구 놀러 다니는 거..나는 지금 쌓여진 일만으로도 몸이 모자를 지경이니까..>

귀찮은 듯 말했지만 솔직히 녀석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이제 고2. 겨우 18살 공부하면서 한창 뛰어 놀고 이리저리 장난치며 여자 친구도 만들고 연애도 할 수 있는 나이이고 이미 주위에 그러고 있는 녀석들 많이 보이기도 하고.. 눈앞에 이 녀석만 봐도 여기저기 여자 만나면서 잘 다니고 있고.. 문제라면 하도 잘 만나고 다녀서 한 달이 멀다하고 여자가 바뀌어서 문제라면 문제지만..

약간은 부럽긴 하다. 근데 말이지...시간이 나야 말이지,, 그 큰 집안 살림 꾸러 나가는 데에만도 꽤 벅차단 말이다. 나는... 가계부도 써야지 집안일도 해야지 동네 대소사에 참관해야지 거기에 간단하게 동아리 활동까지 하고 있는 나로서는 여로 모로 바쁘고 정신없이 보내고 있기에 그런 쪽으로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그쪽으로 관심도 그다지 없구.. 얼굴이 안되서 못한다는 얘긴 안하겠다. 그럴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으니까..물론 나 혼자의 믿음일 뿐이지만..

<하아..그래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됐다..됐어..차라리 초딩한테 연애학 강의를 가르치는게 빠르겠다..>

기분 나쁜 한숨이다..마치 포기라는 두 글자가 저 한숨 깊숙이 빠져나오는 듯 한 느낌이네..

<근데..진짜 마리아가 너 왜보자는 거야??너 무슨 사고쳤냐??>
<사고?? 그런 거 없는데...>
<하긴.. 니가 그럴만한 성격이나 되냐..너한테 큰 사고라 봤자 밥하다 태웠다든가 국하다 쫄았다든가 그런 거 밖에 없는 녀석이니까...>

몇 개 더 있다. 빨래가 밀렸다거나 생활비가 떨어졌다거나... 모두 나에겐 생활이 걸려 미연에 방지해야 할 중요한 사고였다. 역시 오래된 친구라 그런가...날 좀 안다...확실히 나의 하루하루는 이런 것들 빼고는 별 탈 없는 평범하고 안정된 생활이니까..뭐 불만은 없다.. 그건 즉 별다른 이변 없이 나의 인생이 잘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니까.

<뭐...상담 때문이겠지..>
<상담??>
<어...나 저번에 상담 못 받았거든..일 있어서...>

엄밀히 말하자면 그날 동네 중요한 반상회 모임이 있어서였지만 말해봤자 득 될게 없으니까 패스하겠다.

<그래??뭐야.. 그럼 그냥 상담이네..>
<그럼 그냥 상담이지...뭘 기대한 거야??>
<그냥 뭐.. 기대까지는 아니고..우리 가사에 충실하신 우리 강혁양이 왠일로 동광 최고 미녀교사의 부름을 받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었는데....역시...1미리에 오차도 없는 학생이 선생을 부르는 가장 평범한 이유 중 하나인 상담이라니...재미없다..뭐 사고를 쳤다거나 선생한테 반항을 했다거나 좀 더 화끈한 걸 원했는데..>

너의 그 말 같지도 않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나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 흥미를 잃은 듯 낙심한 표정을 짓는 녀석의 반응에 더 이상 대꾸할 의욕을 잃은 나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 보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빠져나가고 비어버린 교실 안에는 몇몇의 아이들만 남아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 역시 거의 끝나 가는지 교실 청소의 마무리 투수인 대걸레를 들고 여기저기 다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옆에서 나의 평범함 같지 않은 평범함에 개혁을 줘야한다며 잔소리를 늘어놓던 지환이 자식 역시 저번에 만난 대학생 누나의 전화 한 통화에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교실을 떠났다. 여자 때문에 홀로 남겨진 친구를 버리다니...치사한 자식..뭐...나라도 그렇게 했겠지만..






(상담실)

일단 오기는 왔는데 어찌해야 하나...노크를 해야 하나 아님 불러야 하나..이런저런 생각에 문화인답게 노크를 결정한 나는 손을 들고 천천히 방문을 두들겼다. 아니 그랬다고 생각했고 분명히 그랬다.

<쿵!!>

하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손이 아닌 내 머리가 문짝에 치이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뭐지??>

그리고 이어지는 의문이 가득한 순진한 목소리.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맑고 깨끗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저 이마에 몰려오는 통증에 머리를 감싸 않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혹시 부딪혔어요??>

보면 모릅니까....부딪 혔어요.. 그랬다. 상담실 문 앞에 서있던 중에 갑자기 열려버린 문짝에 내 머리가 부딪혀 버린 것 이었다. 아까 순간 흔히들 말하는 별이 보였다..열라 아프다는 거다..

<괜찮아요?? 아무도 없는 줄 알고..미안해요....>

상담실 문을 열고 나온 한명의 여자가 머리를 쥐어 싸고 쭈그려 있는 나를 보며 놀란 듯 나에게 다가왔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미안함이 가득 묻어 있는 목소리였지만 갑작스런 충격에 정신이 없는 나에게는 귓등으로도 들리지가 않았다.

<누구 왔니?? 강혁이 왔구나.. 근데 왜 그러고 있어??>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나도 궁금합니다... 매 맞은 강아지 마냥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나를 향해 언제 나오셨는지 문밖으로 빼꼼이 고개를 내민 선생님이 강아지 같은 귀여운 눈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는 듯 의아한 시선을 던져왔다

<저...아..그게.. 제가 문을 열다가...그만>
<설마 부딪힌 거니?? 아...그럼 방금 전에 그 소리가....>

그렇죠.. 방금 그 소리가 내 머리에 있는 뇌세포가 실시간으로 죽어나가는 소리랍니다. 이제야 내 모습이 이해가 간다는 듯 납득의 표정을 지은 선생님과 그 옆에서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한 여학생. 그리고 그 두 사람 앞에서 머리를 문지르고 있는 나...참 정겨운 장면이다..하하...지환이 녀석이 봤으면 사진으로 찍어 두고두고 웃어 재낄만한 장면이다.

<죄송해요...전 아무도 없는 줄 알고...괜찮아요??>
<네..괘...괜찮아요...>

솔직히 안 괜찮다.. 맨땅에 헤딩한 기분이랄까?? 무방비 상태에서 갑자기 맞은거라 통증이 더하다. 근데..그렇다고 아프다고 그러는 것도 없어 보이잖아...남자가 되가지고..

<진짜 괜찮아??소리 들어보니까.. 좀 세게 부딪힌 것 같은데..>

좀이 아니라 엄청 입니다. 정정해 주세요..

<괜찮아요..이정도 가지고 뭘...하하>
<그래도...어머..어떻게..너 이마에 혹났어>
<괜찮아요. 혹은......뭐!!혹??>

나는 황급히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문지르는 손길에 느껴지는 불룩 튀어 나온 살덩어리..
명백한 혹이다.

<아..진짜네..제대로 났어..아...>

가뜩이나 볼 거 없는 평범한 얼굴이다. 이런 작은 흠집마저 나에겐 큰 타격 이었다. 나는 옆에 두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린 채 톡 올라와 버린 혹을 만지작 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훗..후후...>

내 모습이 어딘가 우스웠을까?? 옆에 있던 선생님이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흘려왔다. 뭐가 웃기냐?? 지금 나는 내 얼굴의 오점이 될지 모른 혹 때문에 이렇게 좌절하고 걱정하고 있는데...선생이란 사람이 그런걸 보고 웃다니...어이가 없다.

<선생님...>
<아...미안..크큭..>

내 시선을 의식 했는지 아님 옆에서 눈을 흘기며 그러지 말라는 여학생의 제제를 느꼈는지 그제서야 선생님이 웃음을 참으며 사과를 해왔다. 하지만 한번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는 없었는지 입을 가리면서도 참지 못하고 연신 킥킥 대고 있다. 자제력이 개미 똥만큼도 없구나..이 여자..

<그게...니 표정이 너무 재밌어서... 미안...>

말 안 해도 표정 보니까 너무 재밌어 하는 표정이다. 아직도 낄낄대며 웃고 있는걸 보니.. 이거 쪽팔려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난감하다.

<아...미안 미안..정말 미안....안 웃을게...훗...>

노력은 하는것 같지만 말과 표정이 다르다. 그러니까 그게 미안한 표정입니까..?? 내 눈엔 아주 행복해보입니다 그려.. 그래도 웃는 게 이쁘니까 봐준다.. 웃을 때 마다 고운 양쪽 볼에 새겨지는 보조개와 살짝 아래로 쳐지는 눈매가 선생이라는 직위와는 어울리지 않게 아이 같은 느낌을 주는 게 순수하면서도 귀엽게 느껴진다. 됐다.. 이쪽은 신경 끄자..

<저...정말 미안해요...조심했어야 됐는데..>
<아뇨 괜찮아요...가만히 있던 저도 잘못이죠..>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눈앞의 여성을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나 그래도 여전히 미안해하는 그녀. 그리고...옆에서 아직도 터지는 웃음을 참기위해 키득 거리는 선생님....

답이 없다.. 일단 이 상황에서 벗어나자..

<저...들어가도 되나요??>
<어......그래...들어와...크크..>

그래..웃어라... 웃다 확 사래나 걸려라!! 나에게 마치 죽을 죄라도 지은 것 마냥 한없이 미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를 뒤로 하고 바로 상담실로 들어간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앙에 놓여져 있는 접대용 식탁과 그 양옆으로 배치되어 있는 쇼파. 그리고 구석에 덩그라니 놓여진 냉장고. 그 이외는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실내. 사실 이 상담실이 라는 것이 말이 좋아 상담실이지 대부분은 교사들의 휴게실 정도로만 사용되고 있는 실정이었기에 그리 대단한 것은 없었다.

<여기 앉어~ 음..차라도 한잔 마실래??>

그녀를 보내고 바로 뒤따라 들어온 선생님이 차를 권해왔다. 이제는 진정이 좀 됐는지 아까처럼 나를 보고 정신머리 없는 사람처럼 웃음을 흘리지는 않고 있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고마워 해야하나...

<아뇨, 괜찮아요>

웃으며 사양하자 선생님은 이내 바로 맞은편 자리에서 나를 마주보며 앉아왔다.

<부딪힌 덴 정말 괜찮아?? 약 안 발라도 돼??>

일찍도 물어 본다..아깐 실컷 웃더니...병주고 약줍니까??

<네..뭐 그 정도 까진 아니예요 괜찮아요..>

당신이 웃는 건 안 괜찮았지만 말이야... 선생이라는 사람이 학생 아픈걸 보고 웃다니.. 얼굴 만큼이나 덜 성숙했다..그런 귀여운 점이 매력이긴 하지만..

내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이 여자는 아까도 말했듯이 나만 모르고 있던 악명 높은 동광의 마리아 담탱이 즉 담임 선생님인 유지민 선생님이다. 올해나이 26. 내가 속해 있는 2학년 4반의 담임으로 작년에 우리학교에 부임해온 여선생님으로 학교에서 꽤나 인기가 높은 선생님이었다. 이렇게 유치하기 그지없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면 당연한 거겠지.

확실히 인기가 만을 만도 했다. 약간 갸름하면서 나이에 맞지 않는 젖살이 약간 붙어 통통한 느낌의 볼. 그 볼을 타고 내려오는 꾸불꾸불 귀엽게 어깨까지 내려오는 러브리하고 큐트한 헤어스타일은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한 베이비 페이스를 가진 선생님과 너무나 잘 어울려 선생이라는 직업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워 보였고 그 얼굴 안에 뭐하나 모자란 것 없이 요목조목 예쁘장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들은 어디하나 흠 잡을 데 없이 전체적으로 멋진 조화를 이루며 귀여우면서도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거기에 가득 풍겨 나오는 밝은 에너지는 뭐랄까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 진다고 할까?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 학교생활은 재미있니?? 뭐 힘든 건 없구??>
<네.. 별로 힘든 건 없어요.>

평범하게 시작한 상담은 아무 무리 없이 부드럽게 진행 되어갔다. 힘든건 없냐, 고민은 없냐, 공부는 잘 되가냐, 앞으로 하고 싶은게 뭐냐. 늘 듣던 특별할 것 없는 질문들. 식상할 수 있는 질문들이었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게 마치 그냥 수다를 떨듯 편안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 선생님은 간간히 자연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며 부담스럽거나 거북스럽지 않은 느낌의 조언을 해주곤 했다. 역시 선생님은 선생님인가 보다. 귀엽고 어려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선생님으로서의 포용력도 충분히 훌륭한 것 같고.. 하긴 그러니까 남자나 여자나 상관없이 좋아하는 거겠지. 그리고 그렇게 상담은 순조롭게 끝나는 듯 했다.

<그리고..아! 애들 말 들어 보니까 니가 그렇게 요리를 잘한다며??>

대단한 흥밋거리라도 발견한 듯 선생님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어왔다. 자신이 상담중인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기나 하는지 아이 같은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자니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아뇨..그냥 사람 먹을 만한거 몇 개 만들 수 있는 정도죠...>
<아냐.. 소문이 자자 하던데??>
<아뇨,,,소문까지야...하하...>

훗...여기까지 소문이 난건가?? 내 요리 실력이.. 하긴 내가 좀 한 요리 하긴 하지..크크 오죽하면 내 별명이 동광의 요리왕 비룡이겠냐~ 하하하...

<언제 그렇게 요리를 배운거니?? 선생님은 요리만 하면 개밥으로 줘서 요리 잘하는 사람 보면 신기하더라..>
<그냥 어쩌다가 배우게 됐어요....>

엄밀히 말하자면 먹고살자고 배운 거지만..우리 한 여사가 입이 워낙에 까다로워야지.. 왠만한 음식은 입에도 안데서...역시 사람은 역경이 있어야 강해지나 보다..

<어머님이 좋아 하시겠다. 아들이 요리를 잘해서.. 가끔씩 니가 요리도 해드릴꺼 아냐.>
<어머니는 못 드시죠 돌아가셨으니까.>

너무 태연하게 말했던 내가 이상했던 걸까?? 선생님은 놀란 얼굴로 한동안 나를 바라 보았다. 모르고 계셨나??

<돌아....가셨다구..?>
<네. 5년 전에 교통사고로 두 분 다 돌아 가셨어요.>
<그...그렇구나.. 미안..>
<아뇨, 괜찮아요>

하지만 정작 말을 꺼낸 당사자인 선생님은 괜찮지 않았나 보다. 나의 아픈 곳을 건들었다는 미안함 때문일까?? 아님 선생으로서 좀 더 신중하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일까. 한동안을 어색한 침묵을 이어갔다.

처음 보는 반응은 아니었다. 나에게 부모님의 일을 물어보고 얘기를 들으면 누구나가 다 저런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래도 좀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수 없다. 부모님의 얘기를 들춰서가 아니라 날 바라보는 저 눈빛이 날 아프게 만든다.

어떻게 너무 불쌍해... 어린 것이 어떡하나.. 두 눈 가득 동정의 눈빛을 머금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 그리고 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처해 하는 모습

물론 이해는 한다. 불쌍해보일지도 모른다. 아직 더 보살핌이 필요한 내가 어린 나이에 부모도 없이 자란게... 하지만 저런 시츄에이션은 이쪽에서 사양한다. 부모가 없다는 건 동정 받을 일이 아니다. 그분들은 남들보다 조금 일찍 가신 것 뿐이고 난 그분들을 조금 먼저 일찍 보낸 것 뿐이다. 추억은 언제나 내 머릿 속에 있고 부모님은 언제나 내 맘 속에 살아있다. 그게 다 이다. 난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이 내 힘으로 누나와 함께 잘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잘 살 것이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쓸데없는 동정은 하는 입장에선 부담 없는 선의이겠지만 받는 입장에선 악의이다.

그리고 저런 표정 역시 나에겐 악의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담임 입장에선 어쩔수 없는 거겠지만..

그 후에도 상담은 이어서 계속 되었지만 뭐랄까 방금 전의 선생님의 실수 때문이었을까?? 처음과는 다르게 뭔가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이제 끝난 건가요??>
<어?? 어.. 그런 것 같아.. 미안.. 내가 너무 오래 끌었지??>
<아뇨..>

어딘지 모르게 힘이 빠진 듯한 어색한 웃음을 짓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쓴음을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조심해서 들어가고..휴일 잘 보내고 월요일 날 보자..>

선생님의 인사를 뒤로 하고 등 뒤로 상담실의 문이 닫히자마자 나즈막히 한숨이 흘러나왔다. 집에나 가야겠다. 집으로 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왠지 무겁게 느껴진다. 갑자기 우울해지네..





쏴아~~~~

비까지 온다...우울한 기분에 하늘이 아주 쐐기를 박아준다. 언제부터였는지 잔뜩 흐려진 하늘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비온다는 소리 안했는데.. 기상청은 뭐 한거야.. 맨날 틀려.. 진짜 일기예보는 믿을게 못된다.

<일기 예보는 정말 믿을게 못되네요...>
<내말이...어??!!>

갑자기 들려오는 미성에 고개를 돌린 나는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 왔는지 아까 교실에서 보았던 그녀. 내 마빡에 큰 충격을 가해준 가해자가 흐려진 하늘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빼꼼이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아까....>
<예....그...아까...그쪽..머리...>

내 말에 확인이라도 해주 듯 멋쩍은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마를 만지며 대답해온다. 꽤 길고 고운 손이 매끄러운 이마를 만지는 수줍어 보이는 모습이 꽤나 청순해 보였지만 아까의 상황을 상기 시킨 다는 점으로 볼 때 나에게는 그닥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었다. 그런 재스쳐 까진 필요 없는데 말이지...

<근데...아까...나가지 않았어요??>
<저...그게...갈라고 했는데 갑자기 비가 와서요..그냥 지나가는 빈 줄 알고 잠깐 기다리면 되겠지 하고 있는데 영 그칠 기미가 안보이네요..>

내 보기에도 저 놈의 하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아주 들이 붓는 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우산..없어요??>
<아...오늘 일기예보에서 비 온다는 소리를 못 들어서 안 갔고 왔거든요..>

이런 이런...아직도 우리나라 기상캐스터의 말을 믿는 순진한 사람이 있다니.. 기상 캐스터가 보도해주는 날씨 얘기는 우리 누나가 나를 쥐어 팰 때 하는 사랑의 매다~ 라고 하는 말만큼이나 신빙성이 떨어지는 말이다. 그런 연유로 항상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준비성을 보이는 나는 이런 갑작스런 자연재해(?)에도 전혀 끄덕 없다는 얘기지..

하지만 여기서...문제...내가 여기서 난 우산 있는데~~ 라고 하면서 그냥 가버리면...정말 나쁜 놈이 되지 않을까?? 저기 여자 혼자 남겨 두고 명색이 물건 달린 사내라는 내가 혼자 달랑 가버리면 말이야..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려던 나는 살며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름을 바른 듯 윤기가 잘잘 흐르는 길고 검은 머리칼을 얇은 허리께까지 차분하게 늘어뜨린 그녀는 속도 모르고 내리는 빗줄기가 원망스러운지 아쉬운 얼굴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엘라스틴 했어요라고 할 만한 까맣게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투명한 피부와 선하고 여린 눈매가 가녀린 체구와 어울러져 어딘가 보호본능을 불러 일으켜 온다.

<저기...그럼 이 우산 쓰실래요??>

살짝..아니 솔직히 많이 고민 했지만 이게 제일 나은 방법이다..차마 같이 쓰고 가요!! 라는 말은 속보일까봐 못하겠구..

<네?? 아뇨~괜찮아요...>
<아뇨..쓰세요...저보단 그쪽이 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래도...이거 저 주면 그쪽은 어쩌고...>
<저야 뭐..여기서 잠깐 기다리죠.. 지나가는 비 같기도 하고 좀 있으면 그칠 것 같은데...>

쏴아아~~

내말이 들리나?? 아주 타이밍도 죽이네.. 내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비가 더욱더 무서운 기세로 쏟아져 내려온다. 어찌나 세차게 내리는지 빗물 부딪히는 소리가 우레 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아닌....것 같은데....>

내보기에도 그런것 같다..

<아뇨....금방 그칠거예요....하하하>

웃고 있지만 웃는게 아니다... 진짜 난 어쩌나..누나한테 전화할까?? 아냐..그 인간은 절대 나올 인간이 아니다..바쁘다고 하면서 그냥 비 맞고 가라고 할 인간이다.. 그럼 애들한테 전화 할까?? 아니지..지환이 자식은 여자랑 놀고 있느라 전화도 안 받을 텐데..천상 비를 맞고 달려야 하나??

<저...그럼 같이...쓰고 가실래요??>
<네??>
<저랑....같이 쓰고 가요...혼자 쓰면 제가 너무 미안하니까..>

뭔 말이지?? 그니까 지금 나랑 같이 가자는 건가?? 저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서?? 나는 잠깐 멍한 눈으로 눈앞에 그녀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제대로 마주본 그녀의 얼굴은 확실히 아까 언뜻 봤을 때 보다 더욱 와 닿았다. 맑지만 어딘가 여려보여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것 같은 촉촉한 눈동자에 화려하진 않지만 수수하면서도 청순한 느낌을 풍기는 이목구비. 입고 있는 교복이 그 순수함과 너무 잘 어울리는 그녀는 여고생이 뿜어낼 수 있는 순수함과 청순함을 모두 갖추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주 보니까 더 이쁘네..우리학교에 이런 애도 있었나??

<싫으..세요??>

싫을 리가 없다. 이런 청순한 미소녀랑 어깨를 맞대고 우산을 쓰고 가는 게..목소리도 바람이 부는 듯 살랑살랑한 게 얼굴과 너무 잘 어울린다. 드라마속의 그 흔한 레파토리지만 실제로는 가뭄에 콩 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경우의 수를 가진 일인 것이다. 당연 싫을 리가 없다.

<아뇨!! 싫은 게 아니라...괜찮겠어요?? 불편..할텐데...>
<저라면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솔직히 혼자 쓰고 가는 게 맘이 더 맘이 불편할 것 같아서요...>

착하다...얼굴도 착한 게 맘까지 착하다. 조근 조근 말하는 게 아주 목소리도 좋고..

<그래요...그럼>

나이쓰!!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자신은 없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런 나이쓰한 상황이라니..

나의 대답에 결국 하나의 우산을 같이 쓰게 된 우리는 천천히 빗속으로 들어갔다.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다. 많이 가늘어 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많은 양의 비가 우산으로 위로 떨어지고 있었고 우산이 그리 큰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잔뜩 몸을 움츠린 채 조심조심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이 어색한 침묵은 어쩌냐.. 마치 세상의 소리가 지금 들리는 빗소리 밖에 없는 것 같다. 젠장...뭐라도 얘기해야 하나?? 도둑질도 해본 놈이 한다고 뭐 여자랑 얘기를 해봤어야지... 내가 아는 여자라고는 동네 똘이 아줌마, 슈퍼 미달이 아줌마정도에 괴팍한 우리 한여사 밖에 더 없으니...정상적인 대화가 나올 리가 없다.. 지환이 녀석 말대로 평소에 여자 좀 만나볼걸 그랬나.... 뭔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좀처럼 말 꺼내기가 힘들다.. 민망하기도 하고..남자로서 뭔가 해야 될 것 같긴 한데..

<저기..>
<네??>

순간 그녀의 조용한 선사에 종이 울리는 것 같은 맑은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그게...어깨가......>
<아...이거..>

그녀의 손짓에 고개를 돌려보니 언제 맞았는지 우산 밖으로 삐져 나와 있던 내 왼쪽 어깨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하긴 당연한 일인가... 작은 일인용 우산을 두 사람이 같이 쓰고 있으니.. 거기다 왠지 붙어서 가기가 좀 이상하고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간격을 유지하다보니 자연스레 내 몸의 절반이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아...괜찮아요..>

웃으며 말했지만 솔직히 괜찮진 않다. 찝찝하네...나 비 맞는 거 엄청 싫어하는데..

<아닌 것 같은데.....계속 비맞아가지고 젖는 것 같은데...>

그녀의 말 그대로였지만 별수가 없다. 이게 동네 편의점 앞에 있는 대형 파라솔도 아니고 1인용인 우산을 두 명이 쓰고 가는데 안 젖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여자를 젖게 할 수도 없고.. 이래뵈도 기본적인 매너는 있는 놈이다 내가..그 매너의 활용 범위가 바늘구멍만큼 작아서 그렇지..

순간 팔뚝을 타고 전해져 오는 부드러운 느낌에 나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그녀가 한발을 움직여 내 옆에서 비어있던 공간을 메우고 서 그녀의 가녀린 팔뚝이 내 살갗에 맞닿아 있었다.

<저..그게 이럼....안 젖을 것 같아서요...>

약간 수줍은 듯 여리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좁은 우산 안에 맴돈다.

<아...네....>
<불편하세요??>
<아뇨! 아뇨...괜찮아요..>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솔직히 안 괜찮다. 살이 완전히 닿잖아. 단 1미리에 공간도 없이 맞닿아 있는 그녀의 피부...마치 팔뚝에 솜털을 문지르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느껴지는 그녀의 체온과 좁은 공간에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는 뭔지 모를 여고생의 상큼한 향기가 내 코끝을 간질이는 게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든다. 거기에 귓가에서 들리는 듯 한 그녀의 고른 숨소리를 따라 심장이 이리저리 쿵쾅쿵쾅 거린다. 나는 천천히 눈동자만을 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잡티 하나 없는 투명한 피부에 눈동자 가득 물기가 가득한 듯 젖어 있는 듯 한 사슴 같은 눈망울. 그리고 그 위에 붙어있는 누나의 진하고 세련된 속눈썹과는 다르게 깨끗하고 여린 느낌의 속눈썹은 아직 완전히 여물지 못한 여고생 소녀의 싱싱함을 뽐내고 있었다.

두근 두근...

이게 미쳤다...아주 북을 울려라...옆에 사람 다 들리게... 진짜 왜 이렇게 진정이 안되지??

<저기...괜찮아요??>
<네??>

설마 들킨 건가?? 하긴 소리가 좀 컸어야지. 뭐라고 변명하지??

<저...아까....그 머리...부딪힌 거요..>
<아...그..그거요?>

다행이다. 내가 생각한 그건 아닌가 보다..근데 쪽팔리게 그 얘기는 왜 또 꺼내나..

<괜찮아요...이정도 가지고 뭐..>
<아까 보니까 되게 세게 부딪힌 거 갔던데...보니까 여기 혹도...>

순간 그녀의 고운 손이 나의 이마를 어루만져 왔다. 여린 손끝이 혹 난 이마를 부드럽게 쓸며 지나가자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죄송해요... 아퍼요??>
<아...아뇨...>
<죄송해서 어떡해요..괜히 저 때문에....>
<아뇨..문 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제 잘못이 더 크죠.. 신경쓰지마요..>
<그래두.. 흉지는 거 아니예요??>
<아뇨..이 정도론 흉 안져요.. 그 정도로 심하게 다치거나 한건 아니니까..>

몇 년을 누나에게 두들겨 맞으며 자라야 할 키보다 맷집을 더 키웠던 나다. 이 정도론 기스도 안난 다는 얘기지..

하지만 계속되는 괜찮다는 말에도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감출 줄 몰랐다. 되게 착하네.. 얼굴도 이쁜게.. 그런 당신 표정을 보고 있으니까 내가 더 미안해진다. 우리 누나 같았으면 사내자식이 이런 걸로 혹이나 난다고 덜 맞아서 그런 거라고 막 뭐라고 했을텐데...같은 여자지만 참 다르네...참 달라..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언제 다 왔는지 우리는 활짝 열려진 교문에 다 달아 있었다. 벌써 다 온건가.. 우리 학교 운동장이 이렇게 좁았나?? 왠지 서운하네.. 기합 받을 때는 오지게 넓더니만 오늘은 왜 이런 건지 모르겠다. 이게 다 무분별한 증축의 부작용이다. 건물 좀 작작 짓지.. 이래 가지고 애들이 운동장에서 운동이나 제대로 하겠어..

<전 이쪽으로 가서 버스 타는데..그쪽은 어디로 가세요??>
<아...전 저쪽으로 가요...지하철 타거든요...>
<반대네요...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도와 주셔서 고맙습니다..그리고...여기 우산...>
<아뇨.. 우산은 쓰고 가져가서 담에 줘요..전 지하철역까지 뛰어 가면 되니까요..>
<네??아뇨....그러실 필요 없어요...여기서 정류장까지 얼마 안 머니까 뛰어가면 되요..>
<아뇨..제가 맘이 불편해서 그래요..전 진짜로 괜찮으니까..쓰고 가요..>
<그래도..>

내 우산을 자기가 그냥 쓰고 가기에는 불편한 마음이 드는지 얼굴 가득 곤란함과 미안함이 섞인 얼굴을 해왔다. 이대론 여기서 서로 양보만하다가 비 그칠 때까지 있겠다 싶은 마음에
나는 그녀의 손에 우산을 억지로 건네 갔다. 살며시 감싸 쥔 손을 타고 솜 한 뭉치를 잡으 것 같은 부드러움이 전해져 왔다.

<여기요...그냥 쓰고 가요..그럼 나 먼저 갈께요..>

혹여 라도 그녀가 우산을 가져가라고 할까봐 재빨리 밖으로 나와 빗속을 정신없이 뛰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멀리 서 있는 그녀가 나에게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그러는 거지..?? 그냥 우산 가져가라는 건가?? 모르겠다..뭔지도 모를 그녀의 말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대로 계속해서 빗속으로 뛰어 들어 갔다.





얼마나 뛰었을까?? 잠시 비를 피하기 위해 외진 건물의 입구로 들어간 나는 교복에 묻은 물기를 털어 내며 잠시 숨을 돌려갔다. 달려오는 그 짧은 사이에 젖었는지 교복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로 축 늘어져 살결에 착 달라 붙어있었고 신고 있던 신발 역시 고인 빗물이 튀겨 안에 들어 갔는지 축축해진 신발 밑창이 발바닥을 적셔 심히 찝찝한 기분을 주고 있었다.

완전 비 맞은 생쥐 꼴이다..그냥 우산을 가지고 올걸 그랬나..지하철역까지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아니다.. 사내 자식이 되가지고 이정도 가지구 뭘... 여자를 비 맞게 할 수는 없잖아!! 그래 잘 한거야!! 근데 쫌 후회되긴 한다...

<아.....진짜 비 오지게 많이 오네...>

끊임없이 내리던 빗줄기는 그칠 기미도 없이 여전히 그 위세를 뽐내며 힘차게 내리고 있었다. 뭐가 이렇게 많이 온다냐...하늘에 있는 물탱크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난 그다지 비를 좋아 하는 편이 아니다. 찝찝하고 끈적끈적 하고 그러다가 비 맞아서 젖기라도 하면 그 더러운 기분은..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비를 싫어하는 이유는... 역시 집안일 때문이다. 비가 오면 역시 제일 곤란한 게 역시 빨래니까... 빨아도 잘 마르지도 않고.. 그러면 빨래 안하면 되잖아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오산이다. 그래 안하면 당장은 좋다. 하지만 그 다음 날이 되면?? 산처럼 쌓여있는 빨래는?? 가뜩이나 우리 한 여사가 내놓는 엄청난 빨래 거리 때문에 평소에도 짜증이 치미는 난데 그게 이틀이나 쌓여 있으면..그런 끔찍한 광경은 생각하기도 싫다. 차라리 그때 그때 해치워 버리는 게 낫지..

그리고 우리 한 여사가 또 좀 까탈스러워야지... 손 하나 까딱 안하면서 뭐가 그렇게 잔소리가 많은지 습기가 차서 눅눅한 침대에서는 단 1분도 누워 있기 싫어 하셔서 수시로 침대보를 갈아줘야 하고 수시로 눅눅해진 옷을 다려 입혀야 한다. 단 하나라도 빼 먹으면 날아 오는건 역시 정직한 주먹 뿐이다.

이러니 내가 비오는 날을 좋아 할 수가 있나.. 아마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 있다면 바로 여름. 그것도 장마가 시작 된 여름. 덥고 찝찝하고 끔찍하다 진짜..

근데 어째 거리에 사람이 없다. 비 맞기 싫어서 다 들어갔나?? 그래두 한명도 안보이는건 좀 이상한데..

의아한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지만 역시 아무도 없다.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 보이는 건 역시 굵은 빗줄기뿐... 마치 이 거리에 원래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왠지 으스스한 느낌인걸??

순간 나의 시야에 빗속을 뚫고 걸어가는 하나의 인영이 보였다. 저건 뭐야.. 사람?? 아니 사람이라고 하기엔 실루엣이 너무 작다.. 갓난아이의 꼬마라고도 볼 수 없을 정도의 그 작은 실루엣을 나는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물체를 바라보았다.

뭐야...개 잖아?? 분명 그것은 개였다. 아니 강아지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작은 몸짓을 갖고 있는 그것은 천천히 천천히 저 멀리 횡단보도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근데 왜 저렇게 비틀거리지?? 마치 술 마신 것 처럼... 근데..저 개...혹시...

나는 뭐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비가 내 몸을 흠뻑 적셔 왔지만 나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강아지에게로 다가갔다.

<도치??>

내 말을 들은 건지 아니면 그냥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정체가 무엇인지 보는 건지 횡단보도를 건너던 강아지가 멈춰서 나를 바라보았다.

똑같아.. 우리 도치하고.. 근데....이거 진짜 술 마셨나?? 왜 이렇게 눈이 풀려있어??

말 그대로 강아지의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눈의 초점도 정확하지 않았고 헤 벌어진 입 사이로는 혓바닥이 축 늘어져 할딱거리거고 있었다. 근데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람 같아 보여 나도 모르게 괜찮으세요?? 라고 안부를 물을 뻔했다.

그때였다. 멍하니 서있던 강아지의 얼굴이 처음으로 나 아닌 다른 곳을 향해 돌려진 것은..강아지만을 보고 있던 나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저 멀리서 무서운 기세로 빗속을 달려오고 있는 차 한대를..

다시 강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서 차가 오고 있는데도 이 멍청한 강아지는 피할 생각이 없는 듯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순간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장면이 떠올랐다.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에서 강아지를 안고 있는 꼬마.
그 팔에서 빠져 나와 도로로 뛰쳐나간 강아지..
그리고 달려오는 차 한대...
차가 지나간 뒤 바닥을 적시는 핏물..


젠장!! 순식간 이었다. 머릿 속에서 벌어 진 그 상황도 내가 강아지를 향해 뛰쳐 나가는 지금도.. 어느샌가 내 몸은 강아지를 향해 뛰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냥 몸이 먼저 움직였고 그 다음 머리가 움직였다.

구해야 해!! 반드시!!

나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강아지를 낚아 채갔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에 느껴지는 감촉은 없었다. 이상한 느낌에 멈춰선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언제 갔는지 강아지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내 손에 있어야할 그 강아지가.. 이런..썅.. 순식간에 강아지와 자리가 뒤바뀌어 버린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 보았다. 여전히 빗 속을 뚫고 차 한대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엔 나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것.. 비 때문에 내가 보이지 않는 지 전혀 멈출 기미가 없어 보인다. 하긴 지금 멈춰도 소용 없을 것 같다.

썅... 좆 됐다...

꽝~~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 몸이 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공중에 떠있는 그 시간은 무척이나 오래 느껴져 내가 날고 있는 건 아닌가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올라가면 언젠가는 떨어지는 법. 만유인력의 법칙을 증명이라도 하듯 내 몸도 곧 땅에 떨어졌다. 두 눈의 시야가 방에 불을 끄듯 조금씩 어두워져 갔고 몸을 차갑게 적시던 빗방울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통증은 없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거 생각만큼 대단한건 아닌가 보다. 아프지도 않고... 그럼 엄마, 아빠도 안 아프셨을려나?? 좀 틀린가?? 이따 만나면 물어 봐야겠다.. 만날 수나 있을라나?? 만나면 누나가 나한테 했던 거 다 일러 줘야겠다.. 때리고 구박했던 거 다 일러서 혼내달라고 해야지..하아....말하니까 벌써 보고 싶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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