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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l BDSM] 난 사람, 넌 동물  

[real BDSM] 소유감 / 피소유감을 느끼게 하는 클리쉐들 1
- 난 사람, 넌 동물

[real BDSM] 난 사람, 넌 동물              이미지 #1
Araki Nobuyoshi [Excessive Flower Emotions]
클리쉐를 이야기해보자

안녕하신가? 잠시 재미없는 이야기를 시작해 볼 테니 조금만 참아주시라. 클리쉐란 말부터 - 클리쉐란 ‘상투어구’를 뜻한다. 이 상투어구란 이미지(사진, 회화, 조각)나 이야기(시, 시나리오, 영상연출)에 ‘함부로’ 등장하는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장치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국내의 한 뮤직비디오를 본다고 해보자. 여기에 가죽잠바를 입고 미국의 한 해안을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국내 남자스타가 등장한다고 치자. 여주인공은 예쁠 뿐만 아니라 불치병까지 걸려서 더 예뻐 보인다. 이 둘은 힘이 잔뜩 들어간 눈빛 연기 등으로 불행의 포스를 마구 발산하며 사랑하다가 남자는 거리의 비정한 논리에 따라 권총으로 죽게 되고... 여자는 그 모습을 보며 오열, 죽인 남자와 죽은 남자, 더럽게 불쌍한 여자는 사실은 삼각관계며... 등등

여러분이 이런 뮤직비디오를 보며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것은 감정이 메말라서가 아니다. 이제는 익숙해서 지겨울 만큼 빤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클리쉐로 떡칠이 되어 있다, 고 말한다면 대략 맞는 표현이다. 핸드폰 사진의 ‘얼짱 각도’도 넓은 의미에서는 충분히 클리쉐라 부를 수 있다. 홍수와 같은 대중문화 속에서 온갖 이미지와 스토리들이 넘쳐나는 요즘 클리쉐라는 단어에 대한 느낌은 그닥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사랑하는 여자를 꽃에 비유한 최초의 남자는 천재였지만 그 뒤를 따르는 녀석들은 죄다 바보라고.

하지만 클리쉐는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는 것이며 다만 하나의 개념일 뿐이다. 그리고 좋은 의미의 클리쉐도 얼마든지 있다. 영화나 플래시애니메이션 등에서 패러디나 오마주가 멋지게 구사된다면 말이다. 여하튼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고, 나는 BDSM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클리쉐라는 단어를 ‘흔하게 쓰이는 전형적인 행위의 방식들’ 정도의 의미로 쓰겠다.

그리하여, 클리쉐를 이야기해보자.

섭의 동물화

고통의 종류는 여러 가지다. 수치심과 모멸감 등의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고, 몸에 대한 직접적인 자극(때리거나 찌르는 것 등) 등 순전히 물리적인 것도 있으며, 신체적인 구속에 의해 생겨나는 두 가지 모두일 수도 있다. SM에는 심리적인 것이 상당히 작용한다.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섭의 ‘동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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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이 BDSM 포르노그라피로 분류될 수 있는 이유는 여성이 보여주는 동물적인 속성 때문이다. 위쪽 사진에서 여성은 암사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아기-자신의 새끼-를 입으로 물어 이동시키고 있다. 아래 사진은 더 노골적이다.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잠들어있는 포유류의 모습 그대로다. 어른들의 놀이에 동원된 아기들이 좀 민망하지만 어쨌든 이 사진이 단순한 누드 이상으로 섹시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쉽게 추측이 가능하다.

동물화된, 동물 역할을 하는 섭과 그를 특정한 방식으로 다루거나 지켜보는 돔. 이 동물놀이에는 관습적이고 흔한 사고방식이 뿌리박혀있다. 바로 [동물은 사람보다 열등하다.]는 관념이다. 사실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한 사고방식이라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좀 더 자세히 생각해보자. 사람은 동물을, 타인-다른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게 함부로 대한다.

물론 외딴 섬에서 장애인들을 착취하거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사람취급 안 하는 개나리 십장생들도 부지기수지만, 일반적인 경우만 이야기해보자. 동물을 사냥하고, 먹고, 가두고, 착취(이를테면 젖소의 우유생산)하는 이유가 다만 동물이 사람보다 열등하다는 이유 때문 만일까?

아주 영리한 침팬지가 있다고 하자. 이 침팬지는 침팬지 세계에서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중의 천재며, 기네스북에도 등록되었다. 그리고 중증 정신지체장애아가 있다고 하자. 사물에 대한 이해력과 지능지수만으로 따진다면 이 침팬지는, 이 특정한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애아를 우리가 천재 침팬지에게 아무렇지 않게 하듯이 우리에 가두고, 목에 개목걸이를 채워놓는다면 아마 그 광경을 보고 가만히 있을 사람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나 여러분이나 상상을 초월하게 분노할 것이다.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나는 세상 한구석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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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 갇힌 노예

동물에 대해 가지는 우월감에는 지적 능력의 차이만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람에게는 우리가 ‘인격’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격의 유무는 중요한 차이를 불러일으킨다. 인격이 있는 ‘사람’들은 주체가 되며, 인격이 없는 ‘것’들은 객체가 된다. 주체는 중심이며 객체는 대상이다. 주체는 객체를 판단하고 해석하고 처리하고 관리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줄기차게 강조하고 또한 바로잡으려 하는 것이 바로 ‘여성이 객체로서 존재해 온’ 지금까지의 역사다. 누군가의 발치에서 네 발로 엎드려 기는 것은 단순히 따귀를 맞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심각하게 표현하자면 자신의 인격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며 주체가 아닌 대상이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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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와 당나귀

세상엔 수많은 돔과 그들의 섭이 있다. 동물을 컨셉으로 한 플레이에서, 한 섭은 홍학을, 한 섭은 물개를, 한 섭은 돌고래를, 한 섭은 곤충을 흉내 낼까? 아무리 개개인마다 취향이 다르고 궁합이 따로 있다지만 그렇지는 않다. 지배/피지배, 혹은 소유/피소유의 감정이 배가되는 행위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특정한 것들로 모여지게 마련이다. 여러분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워 피운다고 해서 모방이나 표절을 운운할 수 없는 것처럼, BDSM에도 여러 가지 클리쉐들이 존재한다. 동물화된 섭의 클리쉐 중 대표적인 두 가지는 개와 당나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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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여자의 목에 개목걸이가 채워져 있다. 남북전쟁시대 흑인노예에게 사용하던 살벌한 쇠사슬보다 훨씬 가볍고 부드러우며, 자유로워 보인다. 이 물건은 물리적으로는 그렇게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지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쇠사슬보다 저 개목걸이에 더 흥분할 것이다. 간단하다. 개목걸이는 사람에게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 여자는 신체적/물리적인 고통은 전혀 당하고 있지 않지만 매질을 당하는 것보다 더 굴욕적이고 비참해 보인다.

우리는 개를 ‘인간의 친구’로 표현하고 있지만-먹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관계의 친구에 불과하다. 사진 속 손의 주인과 여자가 평등한 ‘가족’의 관계라고 상상할 수 있는가? 사람은 개를-애완견일 경우에는- 먹이고 돌보고 쓰다듬어주지만 그것은 개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서적인 만족감이라는 목적을 위해서인 경우가 절대적이다. ‘관리’의 편의성을 이유로 개에게 성대제거수술이나 거세수술을 받는 개들은 철저하게 통제되는 대상으로써 존재하지만 그런 개들의 주인들도 자신들은 개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다음 사진은 이런 면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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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진에서 ‘주인’은 ‘개’를 아끼고 귀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개-여자-는 결코 소중해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아니라 개로서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가 소중한 이유는 개 자체가 아니라 ‘개를 통한 나의 즐거움’이 소중해서가 아닐까. 사진 속의 여자는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위해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 사진은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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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악하지만 나름 정교한 코스프레를 한 이 여자는 개처럼 표현되고 동작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는 자극적일 수 있지만 다른 사진들보다 관능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바둑이 무늬의 순수한 누드보다 미적이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표현 방식 자체가 너무 강해서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간접적인 이미지와 행위들이 직접적인 그것보다 못하란 법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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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돔에게 이끌려 노상방뇨를 하는 섭의 모습이다. 인간 달마시안과 개처럼 배설하기. 어느 것이 여러분들을 더 흥분시키는가? 아니면 어느 것이 더 혐오감을 주는가? 답은 여러분의 몫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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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도그플레이 사진 속에서 주인-남자-은 자신의 개-여자-를 거의 배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개는 주인이 가는대로 말없이 따라갈 것이다. 이제 섭은 무관심한 일상의 대상이 되어 있다. 저 두 사람이 성적인 쾌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건 모래사장을 기어가는 여자의 손발이 아파서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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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적인 경향이지만, 동양의 동물 섭은 개인 경우가, 구미(歐美)의 동물 섭은 당나귀(혹은 말)인 경우가 많다. 왜 하필 당나귀일까. [당나귀 -여성 -섭]을 흔히 포니 걸(pony girl)이라 부르는데, 여기엔 당나귀뿐만 아니라 말의 성격도 포함되고 있다. 일단 먼저 당나귀가 인간과 맺는 관계를 살펴보자. 당나귀는 짐과 사람을 옮긴다. 당나귀는 이동 및 운송수단이며, 어떤 면에서는 개보다 더 직접적이고 실용적으로 ‘이용’되는 대상이다. 이것은 그들이 사람(주인)의 편리를 위해 존재하는 물적 대상임을 말한다.
 
[real BDSM] 난 사람, 넌 동물              이미지 #11

왼쪽 사진 속에서 당나귀처럼 꾸며진 흑인 팸섭은 어느 때고 편리하게 사용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오른쪽의 경우는 앞으로 사용될 것을 대비해 ‘훈련’되고 있다. ‘함부로 들어오지 마시오.’라는 표지판은 이곳이 사유지라는 것을 암시해주며, 사진 속의 포니걸이 사적인 소유물이라는 관념을 배가시킨다. 다음 포니 걸은 아마도 사람이 타고 다닐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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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적인 행위는 비인격적 대상화의 첫 단계라고 봐도 좋다. 주체 - 객체 게임은 직접적인 폭력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교활하고 잔인한 폭력일 수 있다. 여성을 객체로 놓은 남성주체의 역사나, 오리엔트를 객체로 놓은 서양 중심적인 사유처럼 말이다. 미셸 푸코는 한발 더 나아가 개인을 집단적으로 관리되는 대상으로 전락시킨 근대적 이성을 폭력의 제왕으로 설명하기까지 했다. 분명한 것은 BDSM 역시 이러한 폭력을 생산한다는 것이고 섭의 동물화는 그러한 폭력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보다 더 근원적인 것도 있지만, 차차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추상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된 포니 걸 이미지와 함께 오늘 순서를 마친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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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Field-D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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